본문 바로가기

‘시가 문 뚱보’의 낙천주의, 라인강 기적 일구다

중앙선데이 2013.02.10 00:01
“불사조는 잿더미에서 날아오른다.”


'행복한 경제강국' 독일의 리더십 해부 ②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63년)이자 제2대 총리(63~66년)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독일 부흥을 위해 내건 슬로건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풍요롭게 사는 게 꿈이었다. 이 꿈을 실현시킨 리더가 에르하르트였다. 그가 항상 입에 물고 다닌 시가는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을 연상시켰고, 뚱뚱한 체구는 새로운 풍요의 상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군이 바이에른에 진주한 다음 날인 1945년 4월 19일. 남부 프랑켄 출신인 그는 미 군정청의 존 F 쿠퍼 사령관에게 “나는 경제전문가”라며 접근했다. 전임 총리 아데나워는 미국이 찾아낸 인물이지만 에르하르트는 스스로 미군을 찾아갈 만큼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화폐연구소’ 소장 자리를 맡게 된다.



그는 48년 6월 20일 일요일에 단행된 화폐개혁을 주도했다. 이날만큼 독일인 뇌리에 깊이 각인된 날도 없다. 새 화폐 ‘도이치 마르크(DM)’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화폐개혁과 동시에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출발점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시장경제주의자였다.



당시 사민당은 계획경제를 주장했다. 그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경제통제조치와 가격통제를 철폐한다’고 선언했다. 미 군정청과 협의하지도 않은 채 발표한 것이다. 군정청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미 군정청으로 소환당했다. 책임자인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은 화가 잔뜩 나 “어떻게 연합국이 내린 지침을 변경할 수 있나?”라고 힐난했다. 이때 에르하르트는 “지침을 변경한 게 아니라 폐지했다”고 맞섰다. 이런 당당함에 클레이 장군은 결국 그를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가격통제 철폐 뒤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쇼윈도 효과’로 가게마다 물건이 넘쳐났다. 하지만 처음에는 시장이 혼란스러웠다. 물건 값이 급등한 것이다. 진보지 ‘디 차이트’는 “히틀러 독재, 동·서독 분단에 이어 독일의 세 번째 재앙”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했다. 노조 세력은 전후 처음으로 총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자신의 정책을 굳게 믿었다. 낙천적인 리더십이었다. 드디어 그해 말 시장은 안정되고 그가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다.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통해 국가 개입



1964년 12월 9일 에르하르트 총리(오른쪽)가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총리관저에서 영접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전후 독일의 운명적인 만남은 48년 4월 21일 본에서 이뤄졌다.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가 처음 만난 것이다. 둘은 서로 협력하면 공생할 수 있음을 알았다. 49년 8월 14일 첫 총선은 ‘시장이냐 계획이냐’는 경제체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에르하르트는 선거전의 선봉에 나섰다. 아데나워와 기민당에는 천군만마였다. 매사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에르하르트를 독일 국민들은 좋아했다.



초대 경제부 장관이 된 그는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미국식 자유경제나 소련식 계획경제와는 다른 ‘사회적(Sozial) 시장경제’ 모델이었다. 선거 슬로건도 ‘모두를 위한 번영(Wohlstand fur Alle)’이었다. 시장 방임이 아니라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는 데 국가가 개입하는 경제철학이었다. 경제정책 목표는 고도성장을 통한 ‘완전고용’과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경제 재건을 위해 인력·기술·자본 등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려는 모델이었다.



새로운 경제시스템 덕에 독일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서독의 실질 생산능력은 두 배 이상 뜀박질했다. 10년간 성장률은 연평균 8%를 기록했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기적을 기대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이는 모든 국민이 성실하게 노력한 대가”라고 역설했다.



그는 ‘경제 기적’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창의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 일할 수 있고, 일한 만큼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게 그의 업적이었다. 예컨대 그는 1957년 ‘연동연금법’을 제정했다. 근로자 수입이 증가하면 연금수령액도 증가하는 내용이 골자다. 노후생활 안정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에르하르트는 한국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차관 제공 등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다. 독일로 발길을 돌린 박 대통령은 64년 12월 9일 에르하르트를 만난다.



에르하르트는 박 대통령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3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한국의 장래를 낙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차관에 대한 인적 담보를 요구했다. 약 1만8000명의 간호원과 광부들이 독일로 간 계기다. 그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돈은 1억164만 달러나 됐다.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외화 공급원이었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경제발전을 위한 소중한 조언도 들려주었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그 위에 달릴 자동차 공장을 세우세요.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하는 산업입니다. 그리고 제철회사를 건설하세요. 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지요. 또 자동차가 달리려면 석유가 필요하니 정유공장을 세우세요. 수출을 하려면 선박회사도 필요해요.”



에르하르트는 또 “앙숙 관계인 독일·프랑스의 과거사를 언급한 뒤 ‘국가 지도자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며 한·일 국교 수립을 권유했다”고 당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전 의원은 전한다. 한국에 돌아온 박 대통령은 그런 조언을 잊지 않았다.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기업가들을 불러 차관을 나눠주면서 자동차(현대), 철강(포스코), 조선(현대), 정유(SK·GS) 분야의 사업을 독려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65년 한?일 수교도 마찬가지다. 에르하르트의 ‘모두가 잘사는 나라’란 구호가 박정희의 ‘우리도 잘살아 보세’라는 슬로건으로 옮겨졌다. 한강의 기적은 라인강의 기적을 배운 결과인 셈이다.



65년 9월 제5대 연방의회 선거 때 예상을 깨고 에르하르트는 다시 승리를 거머쥔다. 보수진영인 기민당/기사당(CDU/CSU)이 47.6%, 진보당인 사민당(SPD)이 39.3%, 자유계열의 자민당(FDP)이 9.5%를 각각 득표했다. 독일 언론은 이를 에르하르트 개인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서독 건국 이후 다섯 차례 선거에서 모두 기민당이 이긴 배경에는 에르하르트가 있었다.



독일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은 비(非)정치인처럼 행동하는 뚱보 에르하르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신조어들을 만들어냈다. ‘불사조’ ‘사회적 시장경제’ ‘모두를 위한 번영’ ‘모두에게 복지를’ ‘서방과 함께 번영의 양탄자 위에 함께 올라타야’ ‘고도 경제성장’ 등이다.



메르켈도 “에르하르트는 어떤 처방 내릴까”



경제학 교수 출신인 그는 사상가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아데나워에 비해 덜 권위적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았다. 명(名)문장과 수려한 말솜씨로 유권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에게 ‘선거의 기관차’란 별명이 붙은 이유다. 그는 ‘철도가 가장 발전한 나라’ 독일에서 기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유세활동을 펼쳤다.



그가 내건 최고의 선거 슬로건은 ‘모두를 위한 번영’이었다. 기민당은 국민경제와 국민 전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반면, 사민당은 노동자 계급만을 위한 정당이라고 몰아붙였다. 에르하르트 시절 경제 호황과 더불어 성장 과실을 골고루 나누는 시스템이야말로 연전연승의 숨은 동력이었다.



그래선지 진보진영인 사민당은 59년 수도 본의 ‘바트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에서 드디어 정강정책을 바꾸게 된다. 에르하르트가 제기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한편, 계급정당을 포기하고 국민정당으로 거듭나는 게 골자였다. 이를 주도한 사민당의 리더가 훗날 총리가 될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였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항상 시가를 입에 물고 다녔다. 시가 연기는 공장 굴뚝과 풍요로움을 상징했다.
에르하르트는 기존의 정치가들과는 달랐다. 그는 사상가에 가까웠다. ‘사회적 시장경제’로 독일 재건이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국가 발전의 ‘어젠다 2’를 찾아 나섰다. 교수 출신답게 그는 ‘합리적인 틀을 갖춘 사회(Formierte Gesellschaft)’를 내건다. 대중에겐 어려운 용어였다. 그는 정파나 이익집단 갈등이 경제발전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회를 꿈꿨다. 서독의 고도성장 이유 중 하나는 기득권 또는 특권 집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총리직에서 중도 하차해야 했다. 고도성장에서 저성장 시대로 진입하면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 잣대로 보면 당시 3%대의 성장률은 좋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당원과 국민들의 기대 수준은 더 높았다.



당시 독일방송의 요하네스 그로스 기자는 “에르하르트는 정치가 성품에 해롭다는 것뿐 아니라, 성품이 정치에 해롭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는 최소한의 마키아벨리즘도 없이 ‘비정치인’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총리일 때도 교통신호를 꼬박꼬박 지킬 정도였다. 결정적인 패착은 당원과 정당을 멀리한 것이다. 그보다 국민과의 직접 만남을 선호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엇박자가 났다. 대서양주의자였던 그는 미국을 믿었지만, 당시 유럽에선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유럽 중심의 드골주의가 득세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보통사람이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낙천적인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후대 독일의 정치 리더들은 경제 위기 때마다 에르하르트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유럽 경제 위기를 맞아 “에르하르트였다면 어떤 처방을 내릴까?”라며 그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김택환 경기대 교수



김택환 1983년부터 10년간 독일에서 공부한 뒤 학자·언론인 생활을 하며 독일을 꾸준히 공부해왔다. 대한민국의 미래 모델을 모색하기 위한 『넥스트 코리아』를 최근 출간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