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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생활하던 청년, 만화로 대박낸 비결

중앙선데이 2013.02.10 00:01
장그래. 이 청년을 모르면 요새 회사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장그래가 얼마나 유명한지를 말해 주는 사례를 보자. 최근 한화그룹은 국내 10대 그룹 중 처음으로 비정규직 20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화그룹 공식 블로그 ‘한화데이즈’는 이 소식을 “‘미생’의 장그래도 깜짝!”이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중 ‘베플(베스트 리플, 댓글 중 추천수가 가장 많은 것)’로 선정된 것도 “장그래씨, 이제 정규직 될 수 있겠네요”였다.


시대에 촉수 뻗친 이야기꾼…허영만·이현세 '후계자'
파워 차세대 19 웹툰 ‘미생’ 작가 윤태호

어렸을 적 TV에 나온 고우영·허영만·이현세 등 만화가들을 보며 “연예인 같다”고 생각했던 윤태호 작가. 허영만 화백 문하생을 거쳐 데뷔한 그는 이젠 허 화백과 한 달에 한 번 술잔을 기울이는 애제자가 됐다. [사진=최정동 기자]


한때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주인공 ‘무대리’가 샐러리맨의 애환을 달래줬다면, 이젠 그 역할을 ‘장그래’가 이어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둑 특기생이지만 입단에 실패한 후 종합상사 인턴을 거쳐 계약직 사원이 된 청년 장그래.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되는 웹툰 70여 개 중 주간 누적조회수 800만 회를 기록하며 1위를 달리는 ‘미생’의 주인공이다.



얼마 전 100회를 맞은 윤태호(44) 작가의 ‘미생’엔 무한경쟁으로 대변되는 시대의 숨막히는 분위기와, 비록 조직의 부속품일진 모르지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범인(凡人)들의 사연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만화평론가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그를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 시대와 사람 둘 다 놓치지 않는 이야기꾼”이라고 평한다. “장차 한국 만화계에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작가가 나온다면 그건 윤태호일 것”이라는 박 교수의 평가는 과찬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 만화계에서 “허영만·이현세 다음엔 윤태호의 시대”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만은 사실이다. 윤씨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2012 오늘의 우리만화상’ ‘2012 대한민국콘텐츠대상(만화 부문 대통령상)’ 등을 받았다. 만화 분야의 대표적인 상(賞) 2개를 차지한 것이다.



“만화는 이야기”…'모래시계' 대본 베끼며 공부



강우석 감독이 영화화했던 웹툰 ‘이끼’(2007)의 주인공 천용덕. [사진=한국데이타하우스]
윤태호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종이만화에서 인터넷만화, 즉 웹툰으로 갈아탄 ‘이끼’가 나온 게 2007년이다. ‘이끼’로 문화관광부가 주는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 부천만화대상 일반만화상을 받았다. 종이를 뚫고 나올 듯한 과감한 화면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주제의식에 젊은 독자들은 환호했다.



오죽했으면 ‘실미도’ ‘공공의 적’ 강우석 감독이 2009년 영화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왜 당신이 ‘이끼’를 영화로 만드느냐”는 열혈 웹툰 팬들의 항의에 시달릴 정도였다. 하지만 윤씨는 웹툰 2편으로 하루아침에 뜬 작가는 아니다. 올해가 데뷔 20년이다.



많은 만화가가 그랬듯 윤씨도 어렸을 때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전북 군산에 살던 초등학생 시절 이미 학교 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했다. 또래들처럼 TV 속 만화 주인공을 심심풀이로 끼적대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회 지도교사가 오르간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칠판에 분필로 인물 데생을 할 정도였으니 차원이 달랐다.



친구들이 운동회 매스게임 연습하느라 땡볕에서 땀 흘릴 때 그늘에서 표어를 만들거나, 숙제를 안 해 간 대신 수채화를 그려 갈음하는 ‘특혜’를 누리곤 했다. 만화가가 되겠단 생각이 딱히 있던 건 아니었다. 고우영·신동우·허영만·이현세 등 당시 TV에 나오던 만화가들은 그때까진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그림은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없었던 그에게 탈출구였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 기복이 워낙 심했던 탓이었다. “결혼할 때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이사 다닌 주소지만 4장이 넘을 정도”로 자주 주거를 옮겨야 했다. 적응할 만하면 떠나야 하니 친구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았다. 악건성 피부도 약점이었다. 옷 벗고 개울에서 헤엄쳐야 할 나이에 그는 장난치며 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 형편과 신체적 조건 때문에 움츠러든 자존심을 붙들어준 건 오로지 하나. ‘나는 그림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삿짐 실은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릴 때까지도 이사할 집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정도로 어려웠던 집안 형편은 끝내 나아지지 않았다. 미대 진학의 꿈은 접어야 했다. 고교 시절을 보낸 광주를 떠나 만화학원을 다니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온 게 열아홉 살 때인 1988년이었다. 88올림픽을 앞둔 당시의 서울은 그의 눈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사촌형 하숙방에서 신세를 졌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이내 길거리로 나왔다. 신문지를 이불 삼아 하루 한 끼 라면 먹고 지내던 몇 달간의 노숙생활은 뜻밖에도 그를 허영만 화백의 문하생이 될 수 있는 길로 연결해 줬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앞에서 먹고 자던 그에게 다른 노숙자가 “허영만 화백 작업실이 이 아파트에 있다더라”고 알려준 덕이다. 몇 번 거절당한 후 가까스로 문하생이 된 그는 오늘날 애주가인 허 화백과 한 달에 한 번 술잔을 기울이는 애제자가 됐다.



윤씨는 문하생 시절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글이글 불타던 때”라고 회고했다. 과시라도 하듯 화실 책상 위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펼쳐 놓고 잠도 그 위에서 엎드려 잤다. “나는 왜 가난할까, 나는 왜 공부를 못했을까, 나는 왜 피부가 좋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을까 하는 열등감”을 깨뜨릴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림 외엔 없었다.



2년 후엔 조운학 화백의 화실로 옮겼다. 데뷔는 93년, 다른 작품으로 여덟 번이나 퇴짜를 맞고 『월간 점프』에 ‘비상착륙’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자신의 데뷔작을 ‘쓰레기’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스토리는 형편없는데 ‘나 이 정도로 그림 잘 그려’라고 과시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죠.”



석 달이나 공들여 그린 40쪽짜리 작품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평가를 스스로 내린 후 그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만화는 그림이 아니라 결국 이야기”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 대본을 구해 필사를 하며 구성력에 대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그때까지 그림만 그리던 손의 습관을 바꾸자는 결심을 했어요. 소설만 열심히 읽으면 스토리텔링 능력이 저절로 생긴다고 여긴 생각이 어리석다는 걸 깨달았죠.” 이후 그는 ‘혼자 자는 남편’ ‘연씨별곡’ ‘로망스’ ‘발칙한 인생’ 등을 발표하며 차근차근 이력을 쌓아 나간다.



신안 보물선 도굴꾼 다룬 웹툰 준비 중



포털 사이트 다음에 연재 중인 웹툰 ‘미생’. 주간 누적 조회수 800만 회를 기록하고 있다. 바둑특기생 출신 장그래의 회사 생활이 소재다. [사진=위즈덤하우스]
윤씨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시대성’이다. 스스로도 “시대를 먼저 떠올려야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말한다. 사회 부조리를 짚어내고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현실감각이 애독자들이 꼽는 윤태호 만화의 강점이다. 시대를 짚어내는 더듬이가 남달리 발달된 이유는 아마도 5·18 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사춘기를 보낸 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점 등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성 짙은 소재에 만화적 상상력을 입혀 얼마든지 극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예가 초기작인 ‘야후’(98년)다. 그에게 처음으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안겨줬던 이 작품은 건물 붕괴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사회 모순에 분노를 느끼고 권력층을 무차별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성수대교 붕괴에서 느꼈던 황당함과 분노 때문에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이끼’에선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진 외딴 마을을 우리 사회의 압축판으로 삼아 권력 관계에 반응하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미생’은 앞의 두 작품보다 시쳇말로 ‘센’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바둑에 빗대 인생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시대적 리얼리티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과장이 부장보다 높은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기업 생리와 회사원 생활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지만, 3년에 걸친 사전 준비기간 중 열성적인 취재를 통해 넘어서려 애썼다. “왜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이 밤마다 술자리를 전전하는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상사와 회사와 사회에 어떤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성공신화가 아니라 소소한 회사 생활을 통해 보여주려 했어요.”



그는 두 개의 차기작을 계획 중이다.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일간지 연재이고, 다른 하나는 신안 보물선 도굴꾼을 소재로 한 웹툰이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 보수·진보 성향 신문을 비교하며 읽는다는 그가 혹시 만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전혀 꿈도 꿔본 적 없어요. 슬럼프가 올 때도 책상 앞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스스로에게 기합을 준다는 생각으로 그냥 앉아 있어요. 노력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요. 워낙 어려운 데서 시작했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지는 게 두렵지 않아요. 지루하긴 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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