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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고추장 빨간색 넥타이 엔저 효과 덕에 한국 나들이하다

중앙일보 2013.02.04 00:27 종합 35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일본 유학 중인 딸이 방학이라 엊그제 귀국했다. 짐 꾸러미에서 넥타이를 하나 꺼낸다. ‘고추장 넥타이’다. 허 이 녀석 봐라. 지난해 언젠가 했던 고추장 빨간색 얘기, 잊지 않고 있었네. “빨강에도 종류가 많잖아. 그냥 빨간 놈, 불그스레한 놈, 시뻘건 놈, 새빨간 놈…. 아빤 고추장 빨간색이 좋아.” 대학 기념품점에서 고추장 넥타이를 발견하곤 “이거다” 싶었단다.



 “예쁘다. 얼마?” “4000엔” 우리 돈 약 5만원이다. “와, 무리했네.” 평소에도 양말이며 셔츠며 사들고 오긴 했다. 하지만 2000엔 넘는 물건은 사본 적이 없는 딸이다. 길거리 ‘구루마 패션’이나 ‘70% 폭탄 세일’만 골라 다녔다. 올겨울도 전기 장판 하나로 버틴 녀석이다. 그나마 20도 넘게 온도를 안 올렸단다. 옷을 몇 겹 껴입고도 춥다며 달달 떨면서도. 아무리 얄팍한 아빠 호주머니 생각해서라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그럴 땐 참 지독하다 싶을 정도였다.



 “큰맘 먹고 샀어요. 환율 따져보니 100엔에 1185원.” 불과 몇 달 전 1500원씩 할 때보다 그렇게 푸근할 수 없다는 거다. 그 바람에 평소보다 좀 무리하게 됐단다. 이른바 엔저 효과다. 아하-. ‘인간 세상 어디나 좋고 나쁨이 함께 있다(人間隨處有乘除*)’더니, 딱 그렇네. 경제 기자 오래 한 아빠는 엔저 하면 ‘수출 비상’ ‘나라 경제 걱정’부터 떠올리는데, 딸은 돈 쓰기 푸근해졌다니.



 푸근? 그러고 보니 엔저엔 애초 푸근함이 담겼는지 모른다. 엔저는 일본말로 엔야스(円安)다. 편안할 안(安) 자를 ‘싸다, 낮다’란 의미로 쓴다. 중국이나 한국엔 없는 뜻이다. 『설문해자』는 안을 ‘평온하다는 뜻, 여자가 집 안에 있는 모양에서 유래했다(安, 靜也, 從女在家中)’고 풀어놓았다. 일본에 건너가면서 낮다·싸다란 의미가 얹어진 듯하다. 싸고 낮으면 편안하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높으면 불안하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리학의 엔트로피 법칙에도 맞는다.



 엔저는 굳이 편을 가르자면 ‘친서민’ 쪽이다. 수출 대기업보다 서민 쪽이 푸근해진다. 수입 물가 떨어지고 해외여행 가기 쉬워진다. 당장 호주머니 두둑해지는 맛이 있다. 반면 ‘원저’는 어떤가. 원화 값 낮춰 수출기업 밀어줘봐야 별무신통(別無神通)이다. ‘수출 잘돼야 고용 늘고 호주머니 두둑해져 나라가 따뜻해진다’더니 결과는 어땠나. 수출 따로 고용 따로 호주머니 따로이기 일쑤다. 이제는 ‘수출 대기업 환율’ 말고 ‘서민 환율’도 챙길 때다. 엔저든 원저든 적당해야 한다. 지나치면 한쪽 배만 불린다. 엔저에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그러다 자칫 경제 민주화 넘어 ‘환율 민주화’ 목소리까지 쏟아질라.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뒤 증국번(曾國藩)이 동생 증국전(曾國筌)에게 교만함을 경계하라며 지어 보낸 시의 한 구절.



글=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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