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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총화를 위하여

중앙일보 2013.02.04 00:26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감미로운 노랫말을 쓴 오스카 해머슈타인은 이렇게 읊었다. “종은/ 누군가 울리기 전에는/ 아직 종이 아니다.” 아무리 멋진 종이라도 훌륭한 타종수(打鐘手)가 없이는 감동의 소리를 울리지 못한다. 차기 정부는 분열과 대결의 시대를 마감하는 총화(總和)의 타종수가 되어주기 바란다. 그러나 국무총리와 헌법재판소장 인사의 파행을 겪으면서 출발 전부터 삐끗거리는 것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하필이면 대통령의 사돈과 측근에 대한 특별사면까지 터져 나와 국민의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모두 권력의 밀실(密室)이 빚은 불행이다. 총화의 첫걸음은 어두운 밀실에서 소통의 광장으로 나오는 것이다. 존경받던 인물들이 서슬 퍼런 인사 검색대 앞에서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며 공개 망신을 당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공직을 맡겠다고 나선 이들의 자업자득일 터이니, 남을 탓하기 전에 국민의 기대에 어긋났던 자신의 행적부터 뉘우칠 일이다.



 그러나 도덕적 엄숙주의의 날카로운 칼로 한 인격과 그 가족들의 삶을 마구 찔러대는 것은 또 다른 윤리적 파탄의 가학(加虐)일는지도 모른다. 율법적으로 완벽했던 바리새인들을 예수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불렀다. 저들이 자랑하던 선악 2분법의 잣대는 ‘도덕적 경건의 폭력’에 다름없었다. 절도범 장발장을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하고 시장(市長)의 공직까지 맡을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자베르 경감의 정의가 아니라 미리엘 신부의 용서였다. 인사 검증이 ‘인격 심판’은 아닐 터인즉, 비록 부적격자라 할지라도 세상에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안기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관용과 배려 없는 도덕은 도덕적이지 않다.



 인사권자도 여론의 충고와 조언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까지 선거의 승자(勝者)가 전리품처럼 챙겨오던 구시대적 인습(因習)의 특권들을 과감히 내려놓고, 적재적소의 공정한 인사로 국민 총화의 기틀을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능력과 자질보다 대중의 인기를 따르는 이미지 인사, 이벤트 인사로는 사회통합의 길을 열지 못한다. 중국 전한(前漢)의 명재상 병길(丙吉)은 패싸움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고는 무덤덤하게 지나쳤지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소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어찌 사람보다 소를 더 소중히 여기는가”라는 비난에 병길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싸우다가 죽고 다치는 것은 지방행정관이 다룰 일이지만, 소가 숨을 헐떡거리는 것은 날씨의 이상 때문이요 한 해 농사에 관계된 것이니 응당 정승이 살펴야 할 일이다.” 병길은 포퓰리즘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일의 선후(先後)를 냉철하게 분별할 만큼 현명했다. 그러나 일개 옥리(獄吏)에 불과했던 병길의 능력과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힌 선제(宣帝)의 용인술은 더욱 지혜롭다.



 총화의 리더십은 정치공학에서 나오지 않는다. 총화의 열정은 역사의식의 공감대에서 싹튼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대한민국 65년의 역사야말로 국민통합의 구심점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들은 이념적으로 편향되거나 아예 무관심한 탓으로 조국의 역사 인식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역사교육의 실패로 미래 세대와의 단절을 초래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할 막중한 책무가 차기 정부에 주어졌다. 살벌한 신학논쟁이 벌어졌던 17세기에 독일 신학자 루퍼투스 멜데니우스는 시대와 영역을 뛰어넘는 탁월한 총화의 처방을 제시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우리는 멜데니우스의 ‘일치·자유·사랑’을 이렇게 고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는 바탕자리에서는 온 국민의 일치단결을, 그 밖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는 각자의 개성과 자유를, 그리고 모든 공동체적 관계에서 사랑과 나눔의 손길을!” 사랑(amor)이라는 단어에는 죽음(mort)에 대한 부정(a)의 뜻이 숨어 있다. ‘사랑하면 살고 미워하면 죽는다’는 무서운 말이다. 화합은 생명, 분열은 죽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이문재 ‘농담’ 중) 총화의 종소리를 더 크게 울리기 위하여 새 정부는 낮은 자리에서 비판과 질책의 아픔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그 아픔이 클수록 국민통합의 길은 더 풍요로울 것이기에. 양극화의 깊은 골을 메우는 총화의 종소리가 온 국민의 가슴속에 ‘일치·자유·사랑’의 울림으로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그리고 분단의 휴전선 너머 저 북녘땅에도.



이 우 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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