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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아흔, 시 작품 90편 ‘서정주 아우’에서 시인으로

중앙일보 2013.02.04 00:02 종합 23면 지면보기
서정태
지난해 늦가을, 질마재가 내다보이는 우하(又下) 서정태(90)의 전북 고창 집을 찾았을 때다.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동생인 그가 먼 길을 찾아온 일행 앞에서 자작시를 꺼내 들었다. 설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서정태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

 쑥스러운 듯 망설이는 듯, 긴 시간 쟁여놓았던 시를 털어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듯, 그가 낮게 읊조린 시의 한 구절이 방문객들의 마음에 꽂혔다.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시와) 제목은 그 자리에서 정해졌다.



 ‘그냥 덮어둘 일이지/봄바람에 옷소매 스치듯/지난 잠시의 눈맞춤/그것도 허물이라고 흉을 보나//대숲이 사운거리고/나뭇잎이 살랑거리며/온갖/새들이 재잘거리네.’(‘소문’)



 어느 작은 동네에서 남녀가 눈이 맞자 소곤소곤, 수군수군 마을이 수선스럽다. 당사자는 소문을 실어 나르는 바람결이 원망스러웠을 게다. 그게 안타까웠을까. 시인은 “그냥 덮어둘 일이지”라고 말한다. 삶의 뒤안길을 돌아 돌아 어느덧 아흔이 된 그의 목소리는 너그럽다.



 그는 원래 시인을 꿈꿨다. 그러나 미당이라는 큰 산은 넘기 힘들었다. 기자가 돼 전북일보에서만 30년간 일했다. 86년 시집도 한 번 냈다. 미당이 서문을 써준 『천치의 노래』(동아출판사)다. 그렇지만 그의 시심을 담기에는 한 권은 부족했다. 이번에 실린 90편은 모두 ‘오래도록 참아왔던 나의 노래’(‘학이 우는 날’ 중)다.



 그의 노래는 느리다. 한나절 졸음 같다. 고단한 일상에 시달린 이들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가 같은 느낌도 있다. 다 그의 넉넉한 마음 덕분이다. 본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작품도 시의 그윽함을 더한다.



 ‘걸친 것 벗어버리고/다 그만두고/초가삼간 고향집에 돌아오니/알몸이어서 좋다//아직은 춘분이 멀어서/바람 끝이 차가웁지만/방안이 아늑해서 좋다//이제 남은 일이라고는/바깥세상에 한바탕/꽃피는 걸 바라다볼 일일뿐.’(‘남은 일’)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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