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림동 쪽방촌, 무너진 삶이 나의 수도원

중앙일보 2013.01.25 00:00 종합 21면 지면보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윤석찬 신부. 2007년부터 서울 중림동 쪽방촌에서 노숙자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윤 신부는 “주님이 나의 다른 계획들을 다 막아버리고 이 일로 밀어 넣으셨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서울 중구 중림동은 과거와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과 효율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우선 1892년 지어진 한국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인 약현성당이 수십 층짜리 현대식 오피스텔과 이웃하고 있다.

영성 2.0 ② ‘한사랑 가족공동체’ 윤석찬 신부



 약초를 재배하던 고개에 있다고 해서 약현(藥峴)이라는 이름이 붙은 성당은 병아리를 품은 어미 닭의 모양새다. 한 평 남짓한 쪽방 수백 개를 성당 울타리 주변에 거느리고 있다. 이곳에 노숙자, 실패한 사업가, 오갈 데 없는 질환자 등 무한경쟁의 낙오자들이 흩어져 산다. 중림동 쪽방촌 식구들이다.



 쪽방촌은 가톨릭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윤석찬(51) 신부가 일궜다. 2007년 노숙자 등을 하나 둘 끌어들이기 시작해 지금 같은 ‘한사랑 가족공동체’로 키웠다.



 23일 윤 신부를 만났다. 그는 “노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쪽방 하나씩 전용공간이 제공된다는 점이 중림동 쪽방촌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세 끼 식사, 주일 예배 등은 가급적 함께한다. 사생활이 보장되는 느슨한 공동체다.



 윤 신부는 “어느 정도 자립 의지가 있는 노숙자를 선별해 쪽방 월세(20만∼25만원)와 용돈(5만∼10만원)을 두 달간 지원한다”고 했다. 단 세 달째부터 노숙자들은 알선받은 일자리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월세를 내야 한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쉼터와 달리 규제가 거의 없다 보니 몇 년째 쪽방촌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많다. 현재 식구는 100여 명에 이른다.



 윤 신부와 함께 쪽방촌을 둘러봤다. 성당 옆 샛길로 접어들자 대로변에서 불과 20, 30m 떨어졌을 뿐인데도 풍경은 순식간에 바뀐다. 미로 같은 골목, 찌그러진 주택, 얽히고설킨 전깃줄…. 쪽방들은 대낮인데도 창이 없어 대부분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윤 신부가 한 방의 문을 열었다. 어른 하나가 누우면 더 이상 옴짝달싹 하기 어려운 크기다. 핼쑥한 20대 청년이 누워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뭐하고 있어?” "잠깐 누워 있는데요” “점심 먹었어?” “사랑방(공동체 사무실)에서요” “약은?” “저녁 때 ○○형이 가져다 준다고 했어요.”



 윤 신부는 “일할 의지와 힘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건강이나 재활 의지 둘 중 하나가 손상된 경우, 혹은 둘 다 꺾인 경우가 문제라고 했다. 특히 마지막 부류, 재활 의지도 육체적 힘도 없는 사람들은 윤 신부처럼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들을 소진시킨다고 털어놓았다.



 “이곳엔 멀쩡하던 사람도 많아요. 경제적으로 파탄 나고 건강까지 잃으면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거나 스스로 버티기 어려우니까 제 발로 가족을 떠나는 거죠.”



 쪽방촌에는 반드시 밑바닥 인생만 있는 게 아니다. 셋 중 둘 가량이 결손가정 등 어려운 환경 출신이지만 나머지는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떠났지만 방송사 PD였던 사람도 있었다. 명문대 출신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윤 신부는 “한 번 부서지고 깨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혼자 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자립할 능력을 갖춰 임대주택을 얻어 나갔어도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고, 결국 다시 돌아오곤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큰 탓이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쪽방촌은 망가진 심신을 회복해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하는 장소가 아니다. 윤 신부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사는 삶의 자리”라고 했다.



 윤 신부는 20대 초반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종교의 본질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목마름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쪽방촌 공동체는 어떻게 상상하게 된 것일까. 윤 신부는 “하나의 흐름을 읽은 거죠”라고 답했다. 1996년 신부가 된 직후부터 노숙제 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니 쉼터가 해결하지 못하는 틈새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사서 고생한다는 번민은 없었을까. 그는 “주님이 나의 다른 계획을 모두 막아버리고 이리로 밀어넣으셨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없을까. 그는 “물론 해결됐죠”라며 웃음을 지었다. 빈자들과의 공동생활이 그에게 수도요, 수행인 모양이다. 고단한 시대의 영혼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