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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이웃 나라 거지’ 안 되면 되지

중앙일보 2013.01.25 00:00 종합 30면 지면보기
양선희
논설위원
‘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드는 정책’. 최근 신문에서 본 기사 중 눈에 확 꽂혔던 문구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일본의 인위적인 엔화 절하 정책을 비판한 말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출범 전부터 무제한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실행하는 중이다. 이에 세계 각국 반응이 격하다.



 미국 자동차 업계는 일본에 경고하라고 정부 측에 주문했고, 지금 열리고 있는 다보스 포럼도 엔저 성토장이 됐단다. 외신들은 한국이 최대 피해국이 될 거라며 벌써부터 수선을 피운다. 그런가 하면 명동과 인사동 상인들은 싹쓸이 쇼핑을 하던 ‘일본 언니’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며 하소연하고, 수출기업들이 비명을 지른다는 보도도 나온다.



 그런데 정말 비명을 지를 상황인가? 다른나라 사정은 모르겠다. 우리나라 기업 얘기다. 현장기자 시절, 무역 부문을 오래 취재한 터라 환율 변동엔 민감해지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도 작금의 엔 약세엔 별 긴장감이 없다. 사실 그동안의 엔고는 비정상적이었고, 양적완화와 통화약세는 이미 미국·유럽연합(EU)까지 두루 일어나는 현상이어서 우리 기업들도 알고 있는 일이다. 또 인위적 환율 개입이 성공한 사례가 없는 데다 일본은 원전 폐쇄 후 에너지용 화석연료 수입이 급증해 1엔이 떨어지면 연료수입에만 연간 2800억 엔 정도 더 든다는데 계속 엔 값을 떨어뜨릴지 의문이다.



 이 와중에 원화만 나 홀로 강세인 것은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우리의 시장경쟁력이 이 정도에 휘청거릴 만큼 허약하다면 그게 더 문제다. 사실 수년간의 엔고는 수출업계엔 축복이었지만, 이런 보호막 안에 안주하는 건 위험하다. 또 엔저는 예측 가능했다. 우리 기업도 마땅히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업계 사람들한테 물어봤다. 정말 그렇게 나쁘냐고.



 이에 업계는 오히려 늠름했다. 한 수출업체 대표는 “엔저는 여러 시장변수 중 하나, 새로운 도전상황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역협회는 지난달부터 엔저에 따른 수출업계 애로사항 접수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건도 없단다. 회원사 대상 설문조사를 했더니 악영향이 있다는 대답은 17.4%였다. 절반(50.6%)이 일본과의 경쟁이 없다고 대답했고, 경영에 도움이 된다(3.9%)거나 우리 기술이 앞서 있어 유리하다(4.6%)는 대답도 있었다.



 그동안 기업들이 해외투자로 환율의 직격탄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해왔고, 엔화대출이 많은 중소기업은 부채가 줄고, 일본에서 수입하는 핵심 소재와 부품 가격이 떨어지는 효과도 있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를 기화로 일본 제조업이 살아난다 해도 메이드 인 재팬과 메이드 인 코리아의 진검승부에서 우리가 불리하지 않다”고도 했다.



 이렇게 환율문제는 마이너스 요인과 플러스 요인이 상존한다. 그런데도 환율이 움직일 때마다 거의 관성처럼 호들갑을 떠는 건 시장경쟁력과는 별도로 우리 산업구조의 허약함 때문인 것 같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여전히 수출형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고수하는 한, 환율의 움직임에 ‘솥뚜껑 보고 놀라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 또 우리가 일본 제조업을 흔들었듯 중국이 빠른 속도로 한국을 따라잡는 중이다. 실은 환율보다 이게 더 걱정이다.



 일본이 하는 짓은 얄밉지만 환율은 그냥 시장에 맡겨놓을 일이다. 이 기회에 우린 산업구조의 근본적 개편에 나서는 것이 낫다.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그 첫걸음은 금융·의료·컨벤션·관광 등 서비스업을 혁신하고 내수를 살리는 데서 시작돼야 할 거다. 우리 정도의 경제규모에서 남의 나라 백성 주머니에 의존해 먹고살려고 해선 안 된다. 수출기업은 잘하고 있으니 두고, 이젠 겹겹이 쳐놓은 서비스업 규제를 풀고, 돈과 인력이 투입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시급하다. 우리 체질을 바꾼다면 일본 엔화정책에 ‘이웃 나라 거지’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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