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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카라얀도 한 수 접은 ‘천부적 엔터테이너’

온라인 중앙일보 2013.01.20 00:00
leonardbernstein.com
유럽엔 카라얀, 미국엔 번스타인.

20세기 이전까지 미국에는 고전음악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래식음악은 유럽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태어난 유대인 음악가들이 대거 미국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고전음악계는 활기를 띠게 됐다. 1세대 미국 유대인 교향악단 지휘자들은 미국 대도시 악단을 하나씩 맡아 고전음악 불모지인 미국에 클래식음악 붐을 일으켰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미국의 고전음악 전도사 레너드 번스타인

브루노 발터(오스트리아), 오토 클렘페러(독일), 피에르 몽퇴·모리스 아브라바넬(프랑스),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러시아)와 헝가리 출신인 아서 피들러, 조지 셸, 유진 오르먼디, 안탈 도라티, 게오르그 솔티 등은 유럽 태생 유대인으로 미국 클래식음악 지휘자 1세대에 속한다. 미국 태생 유대인 2세대 지휘자도 나왔다.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지휘자·작곡가·피아니스트·음악교육가·작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만능 탤런트였다.



하버드에선 문학과 철학 전공

번스타인은 191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우크라이나 태생 유대인이다. 번스타인은 공부를 잘했으며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피아노를 배웠다. 명문 하버드대에 진학해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꿈은 지휘자나 작곡가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보스턴 교향악단 지휘자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의 연주에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소재 커티스 음악대학에서 지휘와 작곡 기법을 배웠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으로 당대의 대(大)지휘자였던 프리츠 라이너를 사사했다.

번스타인은 40년 보스턴 탱글우드 하계 음악축제의 보조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행운이 찾아왔다. 44년 뉴욕 필하모닉 연주회 때 고령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갑자기 무대에서 쓰러지자 다급해진 주최 측이 번스타인을 대타로 지휘대에 올렸다. 단원들과 단 한 차례도 손을 맞추지 못한 채 지휘봉을 잡았지만 무난하게 그날의 연주를 마쳐 호평을 받았다. 이후 뉴욕 필에 정착했다. 틈틈이 작곡 활동도 했다. 44년 교향곡 1번 ‘예레미야’의 초연을 했다. 2번 ‘불안의 시대’ 그리고 3번 ‘카디시’를 속속 발표한다. 1번과 3번은 유대음악이 주제다.

오페레타 ‘캔디드’, 발레음악 ‘팬시프리’도 내놓았다. 대중음악에도 손을 댔다. 뮤지컬 ‘온 더 타운’ ‘원더풀 타운’, 미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린 그의 대표적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을 내놓았다. 미국 음악계는 그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음악의 지평을 대담하게 넓힌 선구자”란 호의적 의견이 있는 반면 ‘잡식성 음악인’이란 혹평도 있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격의 번스타인은 세간의 비평을 의식하지 않고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벽을 허물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리고 해설을 곁들인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도 자주 열어 클래식음악의 저변 확대에도 힘썼다. 80년 뉴욕타임스는 번스타인을 ‘차원 높은 천부적 엔터테이너’라고 극찬했다.

70년대 들어서자 번스타인은 유럽에 진출했다. 미국 클래식음악계의 유럽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 고전음악계를 휘어잡았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정면 대결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빈 필하모닉을 기지로 삼아 파리·런던·밀라노 등지의 악단도 객원 지휘했다. 번스타인의 재능과 기량은 유럽에서도 인정받았다. 오만하고 권위적인 카라얀도 번스타인에게는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번스타인은 자신의 특기인 낭만주의 음악 외에도 바로크에서 현대음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선곡(選曲)으로 유럽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번스타인은 60년대부터 구스타프 말러 음악에 천착해 말러 음악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유대인·작곡가·지휘자란 자신과의 공통점 때문일지 모른다. 또 우아함과 기괴함, 서정적 분위기와 광기, 공포와 평안 등을 교차시킨 말러 음악의 대칭적 주제에 특히 매료됐다고 한다. 여러 차례 말러 교향곡 전집을 녹음해 디스크로 내놓았다. 절친한 친구였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63년 장례식에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또 68년 암살당한 로버트 케네디 장례식 때는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을 각각 연주하기도 했다.



79년 내한 땐 ‘혁명교향곡’ 놓고 실랑이

번스타인은 89년 12월 베를린장벽 붕괴 축하연주, 90년 8월 보스턴 탱글우드 지휘를 끝으로 무대를 떠났다. 그해 10월 폐암으로 타계했다. 그는 생전에 담배를 물고 산 애연가였다. 알코올 중독자, 양성애자라는 구설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그가 클래식음악의 미국 내 대중적 확산의 선구자였다는 점에는 모든 비평가가 인식을 같이한다.

번스타인은 젊은 시절 미국 공산당을 창당한 존 리드가 설립한 ‘존 리드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50년대 초 미국을 휩쓴 이른바 ‘매카시 파동’에 휘말렸다. 온건한 진보사상을 가진 사람도 ‘빨갱이’로 몰아 사회에서 격리시키던 ‘마녀사냥’의 시대였다. 번스타인도 ‘좌익분자’로 분류돼 미 연방수사국(FBI)의 요시찰대상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며 한동안 여권 발급이 보류되는 등 적잖은 수난을 겪었다. 번스타인뿐 아니라 당시 미국 유대인 중 지식인 다수가 이 매카시 파동의 희생자였다.

79년 번스타인의 내한 공연에 얽힌 일화도 있다. 당시 그는 소련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레퍼토리에 넣었다. 일본에서 ‘혁명교향곡’이란 부제(副題)를 붙인 곡이다. 우리 주최 측은 공산권 작곡가의 곡 연주에 난색을 표하고 다른 곡으로 바꿔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번스타인은 아무 말 없이 예정대로 이 곡을 연주했다. 문화·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던 유신시대의 경직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 예다.



박재선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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