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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남발 … 증인 20명씩 신청하는 사람들

중앙일보 2013.01.16 00:24 종합 14면 지면보기
직장인 A씨(35)는 지난해 3월 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 10m쯤 차를 몰다 음주단속에 적발됐다. 혈중 알코올농도 0.185%. 검찰이 자신을 벌금 300만원에 약식기소하자 A씨는 “벌금이 지나치다”며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B판사(37)는 지난해 말 재판에서 “10m든 100m든 음주운전을 했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A씨가 반성문을 내려고 다가가자 B판사는 “이게 뭡니까”라며 꾸짖었다.


약식명령 불복해 정식재판 청구 매년 10만 건 … ‘고정사건’ 딜레마

 A씨 사건은 B판사가 그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한 86건 중 하나였다. 점심 시간을 빼면 사건당 심리 시간은 5분 남짓. 출석을 확인하고 검사와 피고인 입장을 한 차례씩 듣기에도 빠듯하다. 하지만 피고인들은 “생계가 어려우니 벌금을 깎아달라” “옷을 훔친 게 아니라 잠깐 가방에 넣었던 것이다” “때린 게 아니라 살짝 밀었다”며 읍소한다. B판사는 이날 오후 5시 피고인이 변호인과 잡담하는 걸 보다가 화가 폭발했다.



 “지금 유무죄를 가리는 법정에서 뭐 하는 겁니까! 한 번만 더 그러면 감치하겠습니다.”



 법원이 이처럼 약식명령에 따른 벌금형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사건(일명 ‘고정사건’) 때문에 딜레마에 빠졌다. 판사는 사건 당사자들의 불성실한 태도가, 당사자는 재판을 빨리 처리하려는 판사들의 운영방식이 불만스럽다. 이러다 보니 고정사건이 법원의 이미지를 추락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정사건이 연간 8만~11만 건에 달하는 건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에 따라 원래 벌금형 이상의 형을 선고하지 못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한 법관은 “무조건 재판부터 청구하고 벌금이나 영업정지를 늦추기 위해 단순 폭행사건인데도 증인을 20명씩 신청하는 ‘꼼수’를 쓰는 피고인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당사자는 “판사가 내내 말을 끊고 다그치더라”며 “한 달 만에 선 법정에서 5분 만에 나오는데 이런 게 재판이구나 싶었다”고 털어놨다.



 2011년에는 국회 법사위 소속 의원들이 “소송 남발을 막자”며 불이익변경금지 원칙을 폐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하지만 이정희(통합진보당) 의원이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반발해 가로막혔다. 이한성(새누리당) 의원은 “재판받을 권리는 3심제로 충분하다”며 “소송을 남발하면 결국 납세자 부담으로 돌아온다”고 지적했다. 법원 관계자는 “고정사건에서 징역형까진 아니더라도 벌금을 높일 수 있도록 바꾸고 재판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감치를 강화하는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에선 형사21~26단독 판사 6명이 고정사건을 전담하고 있다. 이들이 각각 월 300~500건(일반 형사단독 판사는 150건)을 맡는다. 이들은 최근 업무부담을 호소하며 법원행정처에 전담부를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





◆고정사건=사건번호가 ‘고정OOOO’인 사건으로, 음주운전·단순폭행·단순절도 사건이 대부분이다. 형사사건을 뜻하는 고유기호인 ‘고’에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한 경우를 뜻하는 ‘정’을 붙여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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