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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의 세상탐사] 정부조직개편 잔혹사

중앙선데이 2013.01.13 01:44 305호 31면 지면보기
이양수 중앙SUNDAY 편집국장
정권 교체 시즌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정부조직 개편을 둘러싼 힘겨루기와 후유증을 일깨워주는 기억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 요즘 정부 부처·기관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 일대 혈전을 벌이고 있어서다.

첫 번째 장면은 김영삼(YS) 정부 출범 초기다. 1993년 3월 꽃샘추위가 한창인 과천종합청사의 옛 동력자원부 건물엔 차관보(1급)부터 7급까지 보직을 받지 못한 50여 명이 서너 개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신세 한탄과 살길 찾기에 바빴다. 냉방 같은 ‘집단수용소’에는 불안한 눈빛과 웅얼거림이 가득했다. 책상과 집기가 이중삼중으로 쌓여 있는 방에서 싸구려 도시락을 함께 까먹으며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후 승진·보직 면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겪은 공무원들은 하나 둘 다른 길을 찾았다.

그보다 석 달 전인 92년 말. 노태우 정부가 끝날 무렵이었다. 외무부(외교통상부의 전신)에서 친하게 지내던 차관보급 인사가 슬쩍 문건 하나를 건네줬다. 부총리급 외교통상부를 만들자는 건의안이었다. 각 부처에 흩어진 통상외교 업무를 한데 모으자는 아이디어도 담겨 있었다. 설익은 개편안은 마치 기정사실처럼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경제부처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이 구상은 98년 김대중(DJ) 정부 들어서야 실현됐다. 미국 국무장관처럼 외교통상부 장관을 격상시키는 방안은 기각됐다.

87년 직선제 이후 역대 정권은 예외 없이 조직 개편 명분 아래 부처 통폐합을 단행했다. 가장 화끈하게 손본 건 역시 YS였다. 93년 2월 취임과 동시에 체육청소년부와 문화부를 합쳐 문화체육부로, 동자부·상공부를 합쳐 상공자원부를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94년 말과 96년에 두 차례의 통폐합을 추가했다. 이에 질세라 DJ도 취임 이후 정부조직을 세 차례 손봤다. 기자들조차 부처 이름을 헷갈릴 만큼 격변기를 겪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처, 어느 기관이든 조직 개편 대상으로 거론되면 죽기살기 게임 모드에 들어간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 학계, 연구기관 등을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벌인다. 조직·개인의 생존과 출세 공간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피해 진영은 5년 후를 기약하며 전의(戰意)를 되새김질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조만간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철학을 가늠할 잣대다. 이명박 정부 때 없어진 교육과학부, 해양수산부, 정보통신부 등이 새 간판을 달고 부활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각에선 지식경제부와 중소기업청 기능을 합친 ‘동반성장부’의 출범을 점친다. 박 당선인의 철통보안 스타일 때문인지 추측만 무성할 뿐 개편안에 대해선 모두들 깜깜하다. 민간기업들도 조직 개편을 할 때 외부 컨설팅을 받거나 내부 의견을 수렴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게 ‘파킨슨의 법칙’이다. 정부조직 개편 못지않게 관료주의의 폐해를 바로잡고 정부효율을 높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국 학자인 노스코트 파킨슨은 1955년 “공무원 수는 일의 경중, 일의 유무에 관계없이 상급 공무원으로 출세하기 위해 부하 수를 늘릴 필요가 있어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파킨슨의 법칙에 주목한다면 박근혜 당선인은 정부조직 개편에 앞서 먼저 국가공무원 61만2000명, 지방공무원 28만3000명(행정안전부 자료)이 자기 밥값을 하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 볼 일이다. 정보화 시대가 본격화됐는데 산업화 시대의 철밥통을 껴안고 있는 정부부처와 공무원들이 적지 않아서다. 그것도 모자라 편법으로 산하기관을 만들어 몸집 불리기를 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이른바 ‘물 좋은 부처’들에 대한 리모델링과 규제 완화도 시급하다. 일 없이 외곽을 떠도는 1000여 명의 ‘인공위성 공무원’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요즘 인수위 주변에선 공무원 증원론이 떠돈다. 이에 대해 학계 인사들은 우려와 기대가 엇갈린다 ‘공무원 한 명 늘리면 규제는 열 개 늘어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심각하게 들린다. 일각에선 정부조직 개편 무용론(無用論)도 만만치 않다. 각 정권마다 작은 정부와 효율, 시대변화를 명분으로 부처 통폐합을 거듭해왔지만 결국 결혼-이혼-재혼을 반복하는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새 정부의 조직·인사·정책은 새 지도자의 뼈와 살과 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철통보안 속에 깜짝 발표도 좋겠지만 시대정신과 국민 기대를 담으려면 숙성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래야만 또 하나의 잔혹사를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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