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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규제 안 할 규제 잘 가려야 한국금융 산다”

중앙선데이 2013.01.12 22:48 305호 20면 지면보기
금융규제 철학 다시 세워야
황건호 전 금융투자협회장=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금융산업도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성장과 저금리 체제하에서 은행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고 10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도 금융과 경제의 뇌관으로 잠복해 있습니다. 한편으론 미국과 유럽의 금융회사들이 주춤한 사이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이 체질을 개선해 해외로 뛰쳐나갈 기회이기도 합니다. 상업은행의 대부이신 김승유 회장께서 리뷰와 전망을 하시는 걸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저도 KB금융 사외이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자본시장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금융 구루에 듣는다 김승유·황건호 대담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금융 규제의 방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세계 금융은 1970년 이후 탈규제(De-regulation)의 길을 걷다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재규제(Re-regulation)로 가고 있어요. 이런 추세가 5~10년 정도 더 가지 않겠나 싶어요. 금융리스크 급증과 도덕적 해이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에는 동의하지만 규제의 방향은 달라져야 합니다. 금융상품이 너무 복잡해져 금융회사 중역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판에 당국이 어떻게 이런 상품들을 일일이 들여다보겠습니까. 규제로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뀔 때가 됐어요.

황=맞습니다. 2008년 이후 세계 금융업계가 규제의 쓰나미를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정이 좀 달라요. 우리 금융업계가 과거의 영미권처럼 자유방임과 시장만능주의 아래서 커온 건 아니거든요. 2000년대 들어 뒤늦게 시장의 중요성을 깨닫고 엄격한 규제를 완화하는 과정에서 2008년 금융위기를 맞지 않았습니까. 한번도 규제가 제대로 풀린 적이 없는 나라였죠.
김=우리 금융은 늘 한발 늦었어요. 1985년 국제통화기금(IMF) 서울총회를 열 때에야 비로소 탈규제라는 화두가 국내에도 부각됐어요. 그 덕에 90년에 ‘금융기관 합병과 전환에 관한 법률’이 생기고, 91년에 제가 근무한 한국투자금융이 하나은행으로 바뀐 거예요. 미국에선 2000년대를 전후해 수학자·컴퓨터공학자들이 가세해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 낸 뒤에 엄청난 변화가 시작됐죠. 월가에는 100만 달러(약 10억원) 이상 연봉자가 급증했어요. 이런 리스크 문제가 터진 게 2008년 금융위기이고, 그래서 규제 목소리가 다시 높아진 거죠. 워낙 세계가 놀랐으니 규제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 가면 금융산업을 뿌리째 흔들 수 있어요.

황=규제 방향이 문제죠. 금융 건전성 규제나 소비자 보호는 강력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당국은 지나치게 구체적 업무와 영업 행위에 촘촘히 규제를 가하고 있어요. 97년 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변화가 많았는데 아직 관료 중심, 공급자 중심의 규제를 하고 있어요. 우리 사회는 ‘금융업이 무엇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축소지향형 균형을 찾아 나가는 듯해요. “선례가 없으니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사업이 되는 쪽으로 민관이 힘을 합쳐 선례를 만들어가는 선순환 구조로 가야 합니다. 서울대 학생들한테 물어보면 예전보다 금융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김=금융계에 자율성을 더 줘야 합니다. 자산 규모 300조원 안팎의 그룹이 1000억원 정도 투자 하는 건 그냥 맡겨둬도 돼요. 평가는 이사회에 맡기면 됩니다. 저도 요즘 경영대 학생들한테 “금융회사 취직하라”고 권하지만 반응이 시큰둥해요. 대개 로스쿨이나 행정고시에 눈을 돌립니다.
 
금융위기는 해외 뛰쳐나갈 기회
황=규제 이야기만큼 국가 경제 규모에 비해 금융 경쟁력이 너무 떨어지지 않느냐는 반성도 합니다. 금융계에선 왜 삼성전자·현대자동차 같은 세계적 기업이 나오지 않느냐,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김=자괴감을 느낍니다. 기본적으로 금융업과 일반 산업의 큰 차이점은 이겁니다. 금융업은 무형자산인 신용을 파는 장사입니다. 삼성·현대는 물건을 제대로 만들면 성공할 수 있죠. 한국 금융사가 세계 시장에 나가 성공하려면 우선 대한민국의 신용도가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금융이 세계로 나갈 때가 왔습니다. 한국의 신용도가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건 과거엔 상상하기 힘들었죠.

황=저는 우리 금융산업도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핵심 경쟁력은 사람인데 우리도 유능한 인재가 많아요. 단시간에 세계적 투자은행으로 급성장한 호주 맥쿼리 창업자를 만날 일이 있었어요. 급성장 비결을 물었더니 “사람과 아이디어”라고 하더군요. 또 하나 금융후발국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선진 금융사들의 실패를 벤치마킹할 수 있어요.
김=특히 소매 금융에는 앵글로색슨 마인드가 있어야 합니다. 근세에 식민지배를 해본 영국 사람들을 보세요. 인도·캐나다·호주 같은 낯선 대륙 현지 주민들의 마음을 읽고 어떻게 파고들지를 집요하게 고민했어요. 밑바닥 마음을 열지 못하면 절대 소매금융은 성공할 수 없어요. 하나은행도 중국 시장 들어가기에 앞서 10년간 중국에 직원 보내 말과 문화부터 익히게 했어요.

황=금융 선진화에는 또 하나 필요한 게 있죠. 전문성 있는 리더입니다. 금융사는 아무나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 현실이에요.
김=전문가를 밑에서부터 키워야 해요. 금융이 뭔가요. 위험 관리(Risk Management)이자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의사 결정이에요. 비즈니스 사이클을 통해 장기간 부침을 겪어 봐야 금융을 압니다.

황=우리 금융업계 경영자들은 단기 업적주의에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강해요. 사실 삼성전자·현대차가 급성장한 게 무엇 덕분입니까. 기업가정신과 안정된 지배구조, 양질의 노동력, 일관된 수출지원책 이런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금융업계처럼 3년마다 경영진 바뀌고 전문성과 시장을 경시하는 인사가 지속됐다면 세계적 전자·정보기술(IT)·자동차·조선·제철 산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가계부채 리스크 심상찮다
황=우리나라 금융이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금융에서 소매금융·가계대출 위주로 돌아섰잖아요. 그 탓에 부동산담보대출 같은 가계부채가 급증했는데 여기에 꽉 잡혀 소비도 늘지 않고 금융 시스템에 큰 위험 요소가 될 거예요. 일차적으로는 돈을 꾼 사람이 책임져야 하겠지만, 대출해 준 은행도 대손문제 해결책을 내야 합니다. 은행은 “정부가 개입해 달라”고 하는데, 소매금융을 주도한 은행이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김=하우스푸어(House poor) 문제는 기본적으로 채권·채무 당사자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요. 도덕적 해이로 신용사회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어요. 정부 재정을 투입한다는 건 집 한 채 없는 사람이 낸 세금으로, 큰돈을 꿔서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 사람 빚을 갚아주는 격입니다.

황=고령화 시대의 중산층 복원 차원에서 연금제도 개혁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연금 자산 운용 규제가 너무 엄격해요. 또 사적 연금 상품의 세제 혜택을 더 과감하게 줬으면 좋겠어요. 중산층이 연금만 든든하게 스스로 준비해 두면 정부의 복지 재정부담도 훨씬 덜 수 있을 겁니다.
김=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의 상당수는 노후 준비가 충분치 않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거예요. 강제저축의 일종인 직장 퇴직금의 중간정산을 많이 한 것도 문제예요. 국민연금은 구멍이 날 수도 있고…. 지금이라도 사적 연금 세제 혜택을 강화해야 합니다.
 
선진국 핫머니 대응책 시급
황=미국·유럽·일본 등의 통화팽창이 한국처럼 금융시장 개방도가 높은 신흥국에 유동성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이른바 3종 세트(선물환포지션 한도 규제, 외국인채권 투자 과세, 외환건전성부담금) 이야기를 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외화가 일거에 빠져나갈 때에 대비해야 합니다.
김=뭔가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과거 선진국 경험을 보면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 고민이에요.

황=원화가 강세를 보이니 주식·채권 시장에 핫머니(Hot money, 단기 부동자금)가 엄청 쏟아지고 있어요. 양질의 자금이 아니죠. 지금은 외환보유액이 넉넉하니 이럴 때 대응해야 합니다. 세계 유가증권 시장의 양대 벤치마크 지수 중 FTSE(파이낸셜타임스스톡익스체인지) 선진국 지수에는 편입됐지만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선진국 지수에도 편입돼야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다자간 통화스와프 확대, 원화의 국제화 같은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김=단기 대처 방안으로 선물환 포지션 규제가 가장 실효성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은행세(외환건전성부담금)나 토빈세(단기성 외환거래에 대한 과세)는 원론적으로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명암이 있는 만큼 정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서민금융 대출 때 복지금융 혼동 말아야
황=김 회장께서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도 맡고 계십니다만 경제양극화 시대에 서민금융 참 중요한 이슈입니다. 사실 서민금융은 새마을금고나 신협·저축은행 같은 서민금융 전업 기관이 원래의 목적에 충실하면 되는데 말이죠.
김=서민금융을 다룰 때 복지와 금융을 혼동하면 안 돼요. 미소금융은 어차피 복지금융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업적이라면 (떼일 가능성이 큰 돈을) 연리 4%에 빌려줘선 안 되죠. 그래서 일반적 서민금융을 복지 차원으로 접근하면 신용 질서가 붕괴됩니다. 미소금융 하다 보니 느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아요. 은행과 고객이 꼭 채권·채무자 관계로만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지금 은행의 비(非)대면 거래가 90%가 넘어요. 냉정하게 따지면 구조조정할 인력이 많은 거예요. 여유인력을 중장기적으로 고객을 위한 재무설계사(Financial planner) 역할로 옮겨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상당 부분을 텔러(teller)에서 빼는 거죠. 그리고 은퇴 생활자나 생계형 창업자, 이런 분들에게 조언해 주는 겁니다. 가계부실, 자영업 부실 막는 건 은행 손실을 줄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황=금융투자 교육을 해오면서 생각해봤는데, 앞으론 금융의 기업성은 물론 이에 못지않게 금융의 공공성이나 금융인의 직업윤리 의식이 더욱 중요해질 거 같아요. 금융 자본주의 시대엔 금융인이 의사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아닙니까. 금융인이 잘하면 어떤 사업을 살릴 수 있고, 잘못하면 어떤 사람의 노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지요. 그러니 금융인도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하듯이 직업윤리 선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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