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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윈(陳雲·진운), 중공 간부 선발 잣대 세워 부국강병 틀 마련

중앙선데이 2013.01.12 20:47 305호 29면 지면보기
항일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겨울, 중공의 항일 근거지였던 옌안(延安)의 생산전람회에 참석한 마오쩌둥(오른쪽)과 천윈. [사진 김명호]
청년 시절, 천윈(陳雲·진운)은 지혜로운 노동운동가였다. 1925년 가을, 21세 때 중국 최대의 출판기구였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파업을 주도한 적이 있었다. 다들 성공한 파업이라며 환희에 들떴다. 본인은 “회사가 잘되는 것이 파업보다 중요한 것 같다”며 후회했다. 마오쩌둥으로부터 “자본주의와의 거리가 50m밖에 안 되는 무산계급 혁명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굽히지 않았다.
신중국 성립 초기, 마오쩌둥은 천윈의 의견을 존중했다. 공개석상에서 “천윈 동지가 한 말들을 새겨듣기 바란다”며 보충 설명을 하는가 하면 “천윈 부총리의 주장대로 선전과 간부교육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성 강한 마오쩌둥이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04>


1956년 새해 벽두, 중공은 50여 개 도시의 자본주의 공·상업을 대상으로 공사합영(公私合營)을 단행했다. 2년 후, 농촌에서도 인민공사운동을 전개하며 농업생산 집체화를 실시했다. 수천 년 동안 사유재산제도를 당연시하던 민족이다 보니 실시하기가 무섭게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기업이 잘되건 말건 매달 받는 돈은 그게 그거다. 손님이 적어야 편하다. 논밭에서 열심히 일해도 소용없다. 밥 세 끼 먹을 뿐, 내 손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농업생산력 저하는 물론이고 베이징 명물이던 둥라이순(東來順)의 양고기와 첸쥐더(全聚德)의 오리구이 맛도 예전 같지 않았다. 먹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마오쩌둥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천윈이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무슨 묘안을 짜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윈이 직접 나서는 바람에 두 전통음식점의 맛이 예전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1962년에 열린 ‘7천인 대회’에서도 마오쩌둥은 “정말 아는 게 많고,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며 천윈을 칭찬했지만 이내 실망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천윈은 끝내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대회를 마친 마오가 2선으로 물러서겠다며 남쪽으로 내려가자 천윈은 당 부주석 자격으로 확대회의를 소집해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몰라도, 모든 걸 너무 빨리 얻으려고만 했다.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천윈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었다. 마오쩌둥에게 인민공사 해체를 건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편지를 열 번도 더 읽은 마오는 한밤중에 천윈을 호출했다. 천윈을 붙잡고 한 시간 넘게 티격태격했다. 날이 밝자 비서들 앞에서 “농촌 집체경제를 와해시키고 인민공사를 해체시키려는 중국식 수정주의자”라며 천윈 욕을 한바탕 쏟아붓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마오쩌둥이 진노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천윈은 ‘아차’ 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 병 치료를 이유로 장기 휴가를 청했다. 마오도 군말 없이 허락했다. 천윈은 두문불출,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책 결정과 담을 쌓고 은인자중한 덕분에 문화혁명 시절도 그럭저럭 넘겼다.

1976년 9월 9일 중양절,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린뱌오(林彪·임표) 사후 중국을 주름잡던 4인방(四人幇)도 몰락했다. 문혁도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2년 후인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중공 제11차 전국대표자대회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三中全會)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개혁·개방을 선포했다. 천윈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부주석,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를 겸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74세 때였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은 인력(人力), 재력(財力), 물자(物資), 모든 게 공백 상태였다. 혁명 1세대가 키워낸 간부들은 너무 늙었고, 젊은 층 중에선 쓸 만한 인재가 없었다. 천윈은 청황부접(靑黃不接),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수확되지 않았다”며 ‘혁명화, 청년화, 지식화, 전문화’의 네 가지를 청년간부 선발기준으로 제안했다. 덩샤오핑도 동의했다.
기준을 잡고 나니 사람 찾기는 수월했다. 4년 후에 열린 제12차 당 대회에 젊은 간부들이 중앙위원회에 진입했다. 후일 중국 최고지도자가 된 장쩌민과 후진타오도 영문도 모른 채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당시 후진타오는 39세, 중앙위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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