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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부정과 절망의 일생 ‘死後 원고 소각’ 부탁

중앙선데이 2013.01.12 20:39 305호 28면 지면보기
중앙포토
종교개혁가 얀 후스,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회민주주의 이론의 태두 카를 카우츠키,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정신분석학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모두 체코 태생이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프란츠 카프카

체코는 수많은 명사를 배출한 중부유럽의 중심국이지만 이 나라의 역사는 고난으로 얼룩져 있다. 툭하면 주변 강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보헤미아-모라비아란 국명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도 속해 보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해 무기생산의 하청공장 역할도 했다.

프라하 법대 나왔지만 변호사 되길 거부
1968년 1월 체코공산당 제 1서기 알렉산드르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혁명’에 불을 붙였다. 그렇지만 7개월 후 소련군의 체코 진주로 ‘프라하의 봄’ 시민혁명은 무산됐다. 89년 말 공산정권 해체와 함께 체코는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해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한 자유진영의 일원이 됐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사진)는 체코의 역사처럼 혼란과 비운 속에서 살다 간 천재 작가였다.
카프카는 1883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변방인 보헤미아왕국 수도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산층인 아버지 헤르만은 일만 아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유대교 정통파 집안 출신 어머니도 나가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린 카프카는 보모나 가정교사에게 의지했다. 남동생 둘은 출생 직후 죽었다.

정육점 집안 출신인 아버지는 아들을 상류사회에 진입시켜 가문의 신분상승을 꾀하려 했다. 그래서 카프카를 왕실 부설 중·고교에 보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친구 몇 명을 사귄다. 사회주의자 루돌프 일로비와 시온주의자 후고 베르크만 등이다. 카프카는 고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프라하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그의 평생지기이며 오늘날 카프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유대인 문인 막스 브로트를 만난다.

카프카는 변호사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졸업 후 노동자 산재보험국에 취직했다. 산재 관련 일을 하면서 그는 대자본가의 횡포에 신음하는 노동자의 실상을 목격했다. 당시 유럽 자본주의 체제는 식민지 경영과 시장의 국가 관리로 표면적으론 안정됐지만 노동자의 근로환경은 매우 취약했다. 그는 노동자 편에 서기로 결심하고 이들의 시위에도 자주 참여했다. 퇴근 후 밤에 이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글을 썼다.
카프카는 정체성의 혼돈에 시달렸다. 독일어를 쓰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영원한 유대인이었다. 또 시온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그에 대한 주변 유대인들의 시선도 싸늘했다. 수줍은 성격에다 외톨이 신세였던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라는 한 여성을 사귀면서 작가로서의 의욕을 보였다. 친구 브로트의 주선으로 단행본 몇 가지를 출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918년 제국을 해체했다. 체코는 독립했지만 카프카는 여전히 더러운 프라하의 옛 유대인 구역을 거닐면서 시름에 잠긴다. 그러다 당시에는 불치병인 폐결핵에 걸린다. 시골농장에서 요양하던 중 밀레나라는 유대인 여성을 만났지만 이내 헤어졌다

1922년 카프카는 15년간 근무했던 보험국을 퇴직하고 여동생 엘리와 함께 발트해 연안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반려자인 유대인 여성 도라 디아만트를 만난 곳이다. 둘은 베를린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의식한 채 디아만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집필을 계속했다. 폐결핵 말기에 접어든 1924년 6월 카프카는 오스트리아 키예를링 요양소에서 숨을 거뒀다. 일주일 후 프라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카프카는 생전에 친구 브로트에게 자신이 죽은 후 원고를 모두 소각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카프카의 작품을 출간했다. 이후 브로트는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만약 브로트가 카프카의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면 카프카의 존재는 영원히 사장(死藏)됐을 것이다.

숙명적 비관론, 사르트르·카뮈에 큰 영향
카프카는 많은 걸작을 남겼다.『변신(Der Verwanderlung)』『심판』『성城』 『아메리카』 『유형지에서』 그리고 『실종자』 등이다. 이 중 단편『변신』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한 판타지 문학이다. 가족 부양 책무에 허덕이던 한 평범한 인간이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다. 선택이나 비약이 불가능한 쳇바퀴 도는 삶을 이어간 한 인간의 절망적 실존이 결국 ‘죽음’이란 영원한 자유를 찾아간다.
살아서는 무명이었던 카프카였지만 그의 사후 발표된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실존주의 문인·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 등은 카프카의 문학적 업적을 크게 기렸다.

카프카는 자신을, 산업사회의 부조리를 쉽게 타파할 수 없는 무력한 대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스스로의 비관적 처지를 소설이나 편지에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활기를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 대다수 인간은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칠 수밖에 없다는 숙명적 비관론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 대중에게 “긍정의 힘을 믿어라”라는 말로 달랜다. 긍정적 사고를 가지면 삶이 밝아진다는 선의의 조언이겠지만 정작 벼랑에 선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긍정의 의미조차 잊어버리고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는 진지한 마음으로 그들의 힘든 처지를 경청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더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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