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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검사, 권총 들고 사우나 앞에서 조폭과…

중앙일보 2013.01.12 00:00 종합 22면 지면보기
1986년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습격 사건을 저지른 혐의로 목포에서 체포된 김태촌씨가 인천경찰서로 압송 되는 모습. 이후 김씨는 ‘전국 폭력계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앙포토]


#지난 8일 오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주민이 4000여 명뿐인 이곳에 관광버스 10여 대와 검은색 고급 승용차 수십여 대가 줄지어 도착했다. ‘갑향군립묘원’ 앞에 멈춰 선 차량에선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내렸다. 국내 최대 규모의 폭력조직 ‘범서방파’의 두목이었던 고(故) 김태촌(향년 63세)씨의 유해 안치를 돕기 위해 따라온 후배 조직원들이었다. 담양군은 김씨의 고향이다. 유해 안치를 지켜보던 주민 김모(70)씨는 “전국을 주름잡던 유명한 조폭 대장이라더니 결국 한 줌의 재가 돼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화장을 한 김씨의 유골함은 이날 납골당 내 5000여 개의 안치소 중 한 곳에 놓였다. 1980년대 국내 3대 폭력조직 중 하나를 이끌며 주먹세계를 풍미했던 김씨가 15년치 임대비용이 80만원인 ‘작은 납골당’에 영원히 갇히는 순간이었다. 생을 마감한 뒤 주어진 공간은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24㎝에 불과했다. 김씨의 부하들은 눈물을 훔쳤다.

김태촌 마지막 1년



 #지난 9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 심재륜 변호사 사무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의 50대 낯선 남자 두 명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김태촌씨 관련 뒷얘기를 듣기 위해 인터뷰차 찾아간 기자에게 심 변호사는 “ 김태촌이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1990년 초 김태촌 검거에 투입됐던 엄모 반장 등 수사관들이 달려온 것”이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혹여 보복 폭행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해 신변 보호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찾아왔다는 거였다.



 평생 쫓고 쫓기던 강력부 검사와 조폭 두목. 그들은 둘 중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쉽게 놓지 못했다. 그만큼 모진 인연이었다. 특히 김씨는 이승과의 작별이 아쉬웠던지 의식을 잃은 뒤 10개월이 지나서야 숨을 거뒀다.



 지난해 3월 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내과 병동. 병실에 입원 중이던 특급 환자가 갑자기 심장발작(쇼크)을 일으켰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료진은 당황했다. 심장 박동을 재는 기계의 눈금은 ‘0’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장이 멈췄다는 의미였다. 곧바로 심폐소생술이 시작됐다.



1분, 2분, 3분…5분…10분…15분. 적막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16분이 흐르고서야 기계의 눈금이 올라가면서 “쿵쾅 쿵쾅”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16분간 심장이 멎었던 이 특급 환자가 대한민국 조폭 ‘보스’의 대명사, 김태촌씨였다. 이후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걸 빼고 김씨의 몸 상태는 정상인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병원 3층 내과기계 중환자실 내 격리실 1호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하루하루 연명했다. 격리실 문 앞에는 ‘최양석’이란 가명 명찰을 걸어놨다. 환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다는 병원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2011년 12월 입원 당시부터 가명을 사용했다. 김씨의 후계자로 꼽히는 양모씨, 두모씨 등은 그동안 김씨의 병 상태에 대해 함구로 일관해왔다.



지난해 3월 휠체어 타고 경찰에 출두하는 김태촌씨.
김씨가 생사의 기로에 놓인 건 지난해 3월 2일 대구지방경찰청의 소환 조사를 받은 직후였다. 지인 김모(48)씨가 “25억원에 이르는 투자금을 받아달라”고 청탁하자 기업인 한모(57)씨를 상대로 협박한 혐의였다. 김씨는 당일 병실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대구로 내려가 밤 10시까지 조사를 받고 난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김씨의 한 측근은 “입원 이후 두 달여 동안 세 번 재수술을 했는데 수술 경과가 나빴다. 그런 상태에서 경찰이 무리하게 소환조사를 강행해 폐렴에 걸렸다. 형님은 폐가 한쪽밖에 없다. 과거 폐암수술 하면서 한쪽을 도려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구경찰청 김선희 폭력계장은 “조사할 때 의사와 변호인이 모두 입회했으며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태촌은 ‘양은이파’의 조양은, ‘광주 OB파’의 이동재와 함께 1970~80년대 주먹계를 주름잡았다. 고교 시절인 17세 때 처음 구속돼 20세 전까지 소년원을 세 번 들락거렸다. 성인이 돼서는 10번 구속됐고 인생의 절반이 넘는 3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76년 3월 서울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 보스였던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면서 존재가 급부상했다. 86년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폭행사건’으로 ‘전국 폭력계의 대부’라는 별명도 얻었다. 당시 서울고검 박모 부장검사의 이권과 관련된 청부폭력사건으로 비화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89년 폐암 진단을 받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90년 5월 서울지검 강력부에 다시 구속됐다. 종교단체로 위장한 범죄단체인 ‘신우회’를 구성한 혐의였다.



 “당시 내가 정덕진(슬롯머신의 대부)과 전국적으로 오락실을 운영했는데 워커힐 카지노를 하던 전낙원(카지노의 대부, 전 파라다이스 회장)과 전쟁이 붙었다. 내가 워커힐 카지노로 쳐들어가서 뺏었다. 그러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엄삼탁(당시 안기부 기조실장)을 시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김씨 주장)



 김씨는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98년 가수 이영숙씨와 옥중 결혼을 올려 화제가 됐다. 보호감호로 수감돼 있던 2005년 6월 말 김씨는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려났다. 보호감호의 근거가 되는 사회보호법이 그해 폐지됐기 때문이다. 출소 후 김씨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인천 순복음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면서 소년원·경찰서 등을 찾아 신앙 간증을 했다.



 그러나 2006년 다시 구속됐고 2007년엔 탤런트 권상우씨에게 일본 팬 사인회를 강요하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2심에서 협박 부분은 무죄가 선고됐는데 이는 권씨가 2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공소 사실을 부인하는 증언을 해서였다. 사업가 이모씨는 “권씨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으로 날아가 김씨와 화해한 뒤 재판에 나가 증언을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1990년 김태촌 검거 주역 2인



심재륜 “국내 조폭이 마피아로 커지기 전에 막아”




김태촌은 평생 10번 구속됐다. 서울지검 강력부 신설 나흘 뒤인 1990년 5월 19일 검거됐을 때 가장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범죄단체 수괴로는 처음으로 1, 2심에서 모두 사형이 구형됐고 징역 10년과 보호감호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초대 강력부장이던 심재륜(69·사시 7회) 전 대구고검장과 수석검사였던 조승식(61·사시 19회) 전 대검 형사부장이 6개월간 치밀하게 준비한 검거 작전의 결과였다.



9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심 전 고검장(사진)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를 일부 공개했다.



 - 김씨가 5일 숨졌다.



 “국내 3대 조폭 패밀리 두목 중 제일 먼저 세상을 떴다. 김(태촌)-이(동재)-조(양은) 시대가 사실상 끝난 것이다. 이씨는 미국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조씨는 세력이 약해진 걸로 안다.”



- 23년 전 ‘조폭과의 전쟁’ 때 비화가 있다면.



 “내가 ‘조폭과의 전쟁’을 구상한 건 1989년 여름 서소문의 서울지검 10층 특수부장실에서였다. 이미 86년 여름 ‘서진룸살롱 사건’과 ‘뉴송도호텔 피습사건’ 등에서 조폭 간 다툼에 회칼이 등장했다. 각자 근거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지역구’에서 ‘전국구’로 진화한 데다 87년 조폭과 정치권이 결탁한 ‘용팔이 사건’(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까지 터졌다. 이를 척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고 이 와중에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을 검거했다. 그건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90년 10월)하기 5개월 전이었다. 정부가 뒷북을 친 것이다. 당시 검찰이 직접 수사해 마피아로 가는 초기 단계에서 세력 확장을 막았다.”



 - 당시 함승희 검사(전 민주당 의원, 현 변호사)가 김태촌 검거를 담당할 뻔했다던데.



 “그렇다. 함 검사에게 물었더니 이승완 호국청년연합회장을 맡겠다고 했다. 정치권 비호세력까지 잡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조 검사가 김태촌을 전담했다. 조 검사에게 ‘범인을 잡으려면 그 범인이 꿈에 세 번 이상 나타나야 한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여라’고 당부했다. 또 ‘수사에서 한 번 실패하면 두 번 기회는 없다. 그러니 예행연습도 충분히 하라’고 주문했다.”



- 국내 조폭 두목의 특징이 있나.



 “현장 주도형이다. 두목이 자신의 실체를 노출하지 않고 배후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마피아·야쿠자와는 다르다. 누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을 기죽이는 걸 좋아하고 세를 과시하는 걸 선호한다. ”





조승식 “38구경 권총 빼들고 사우나 앞에서 체포”



김씨를 실제로 검거했던 조 전 검사장(사진)은 9일 “김씨는 조폭 세계에 사시미 칼을 등장시켰던 장본인”이라며 “그의 죽음은 사시미 칼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역대 가장 많은 조폭을 검거해 ‘해방 이후 최고 악질검사’로 불렸다. 지난해 상영됐던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 나온 열혈검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 고인이 된 김씨에 대한 감회도 남다를 것 같다.



  “1960~70년대 검찰 공소장에 깡패는 직업이 대부분 무직 또는 노동이었다. 그러다 80년대부터 조직화·대형화하면서 대표·대표이사로 명함상 직업이 바뀌었다. 문제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깡패 습성을 갖고 법이 아니라 주먹에 의존해 남의 밥그릇 뺏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시대를 넘어가는 한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제 폭력조직원들도 각자 생업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 김씨 검거 당일 비화가 있다면.



  “그는 주도면밀했다. 우리 수사팀이 움직이려고만 하면 기가 막히게도 먼저 정보를 입수했다.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검경 내부는 물론 각계각층에 비호세력이 많았던 것 같다. 5월 19일 오전 10시 주거지인 서울 동부이촌동 미주아파트 부근 제일사우나에서 사우나를 하고 나오던 김태촌을 수사관 4명이 체포했다. 나는 38구경 권총을 빼 들고 ‘꼼짝 마라’고 소리치고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 그 후 인연은.



 “수사할 때 겪어보니 그 역시 ‘피곤한 분’이었다.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는 조폭은 없다. 김태촌도 머리가 영리하고 다른 깡패처럼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사형 구형 이후 한 번도 마주치거나 만난 적이 없다. 신문 기사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 조폭과 검사가 다른 점은.



 “조폭은 검사에 비해 날이 하나 더 있는 칼을 갖고 있다. 그들이 법과 주먹이란 양날의 칼, 즉 검(劍)을 갖고 있다면 검사들은 날이 한 쪽(법)뿐인 도(刀)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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