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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 파워] 희망은 외롭다

중앙일보 2013.01.05 00:22 종합 34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해 대선일에 개봉한 영화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이 보름 만에 관객수 360만 명을 돌파하더니 놀라운 흥행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사 없이 뮤지컬처럼 노래만으로 이뤄진 데다 세 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이 관객에게 부담스러울 것이란 애초의 예상과 달리 엄청난 몰입을 이끌어내면서 보는 내내 뜨거운 공감의 눈물마저 뿌리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의 몰입과 공감은 영화로서의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론 오늘 우리의 현실적·시대적 분위기와 어우러진 점도 한몫했음을 무시하지 못할 듯싶다. 그래서인지 함께 관람한 지인(그는 지극히 보수적이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던진 이 한마디가 지금도 귓전을 때린다. “이 영화, 일주일만 앞서 개봉했으면 대선판 뒤집어졌겠어!”



 # 이를테면 앤 해서웨이가 열연한 ‘판틴’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겨왔다는 이유로 공장 직공에서 부당하게 해고돼 결국엔 사창가에 팔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보고 가슴 한편이 먹먹하게 아려오지 않을 이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녀가 ‘난 꿈을 꾸었었네(I dreamed a dream)’를 애절하게 부를 땐 더욱 그럴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옥과는/ 아주 다른 인생을 사는 꿈을 꾸었었지/ …(하지만) 삶은 내가 꿈꾸어 왔던 꿈을 죽이고 말았지…” 대선 직후 닷새 남짓한 시간 동안 한진중공업 복직노동자 최강서(35), 현대중공업 미복직 하청 용접공 이운남(42), 민권연대 활동가 최경남(41), 한국외대 노조지부장 이호일(47)씨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판틴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이 내몰린 삶이 그들이 처절하게 부둥켜왔던 꿈마저 죽였기 때문 아니겠는가. 정말이지 오늘의 대한민국이 200여 년 전 혁명과 반동이 교차하던 프랑스와 무엇이 다른가 싶다. 여전히 삶이 꿈을 죽이고 희망을 거세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 1998년 초 개봉했던 영화 ‘포스트맨’에서는 지금 우리가 현실로 마주하고 서 있는 2013년이 곧 영화 속 미래다. 전쟁으로 모든 문명이 파괴돼 폐허가 된 상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흩어져 서로 연락마저 두절된 채 고립돼 있었다. 이때 떠돌던 주인공(케빈 코스트너 분)이 추위를 피해 폐허 속에 방치된 차 안으로 몸을 숨겼는데 그 차는 온갖 사연이 담긴 편지들로 가득한 우편배달차였다. 주인공은 죽은 우편배달부의 옷을 대신 걸치고 그 편지들의 임자를 찾아나선다. 비록 처음엔 편지를 전해주는 대신 잠자리와 음식을 얻어먹을 심산이었지만! 그런데 홀연히 나타나 망실될 뻔했던 편지를 전하는 포스트맨, 즉 우편배달부를 통해 사람들은 뜻밖의 희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떠돌이 주인공도 편지 한 통과 그것을 전하는 자신의 존재만으로 희망을 갖게 되는 이들을 마주하면서 책임감과 사명감마저 느끼게 되며 졸지에 그는 살아 움직이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한 해 동안 가장 형편없었던 영화에 주어지는 골든라즈베리상 시상식에서 최악의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각본상·영화음악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을 만큼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왠지 끌린다. 이유는 하나다. 2013년이란 영화 속 미래, 아니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갈 이 현재에서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래도 희망의 끈을 잇고 그 희망을 전달하며 그 희망의 존재를 메시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시인 김승희가 6년 만에 새로 묶어낸 시집이 내 앞에 있다. 촌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세련된 듯 묘하게 끌리는 핑크색 표지 위에 진하게 박힌 시집의 이름은 “희망이 외롭다”이다. 그렇다. 희망은 외롭다! 절망이 도처에 포진해 있을 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시인의 말처럼 ‘희망은 우리에게 마지막 여권, 뿌리칠 수 없는 종신형’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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