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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히 선고 부탁” 법정서 구형 않는 검찰

중앙일보 2013.01.02 00:07 종합 18면 지면보기
“법과 원칙에 따라 현명하게 판단해 주십시오.” 지난해 12월 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 이원범) 심리로 열린 김지하 시인에 대한 재심(再審) 공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1974년 사형 선고를 받은 지 38년 만에 열린 재심은 첫 기일에 검찰 구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날 검찰은 평소처럼 징역 몇 년 같은 별도의 구형을 하지 않았다. 형사재판에서 검찰이 구형을 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긴급조치 위반, 간첩 조작 재심 …
무죄 구형 못해 잇단 ‘적의조치’
올해 유사 재판 줄 이을 듯



 하지만 새해 재심 법정에선 이런 풍경이 잇따를 전망이다. 검찰이 최근 유신정권 시절 공안 사건들의 재심 재판에서 대부분 ‘적의조치’(適宜措置) 의견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적의조치란 “법과 원칙에 따라 적절히 선고해 달라”며 형량에 대해 검찰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재심을 맡은 한 판사는 “일단 재심개시 결정을 하고 검찰이 적의조치 의견을 내면 재판부에서 무죄를 선고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재심에서도 검찰은 기존 형량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검찰은 ▶헌법재판소·대법원에서 위헌 판단을 내리거나 ▶사실관계를 뒤집는 증거가 나왔거나 ▶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이 인정될 경우에 한해 적의조치 의견을 낸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기소독점권을 가진 검찰이 피고인을 기소해 놓고 무죄를 구형하면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어 적의조치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검사들 중에선 가끔 이런 내부 결정을 넘어 튀는 구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엔 북한을 찬양·고무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에 대한 재심에서 서울중앙지검 공판2부 임은정(38·여) 검사가 무죄를 구형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임 검사는 적의조치하라는 검찰 지휘부 의견을 무시하고 무죄를 구형했다.



 올해도 법원엔 재심 재판이 봇물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에서 고문과 허위자백, 증거 조작 등을 인정받은 간첩 사건들에 대한 재심 신청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민청학련과 인민혁명당 사건 등 유신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에 대한 재심이 줄줄이 열렸다.



 올해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들이 주를 이룰 전망이다. 아직 유신정권 때 긴급조치들의 위헌심판은 헌재에 계류 중이다. 이와 관련해 재심을 요청한 사건들도 모두 심리가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2010년 대법원은 권한이 없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1호는 위헌이다”는 취지로 판결을 내렸다. 이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법관들은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 없더라도 관련 사건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자”고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지법은 이달 중순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이듬해 의문사한 고(故) 장준하 선생에 대한 재심 여부도 결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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