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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2012년에 묻어버리고 싶은 것

중앙일보 2012.12.28 00:55 종합 34면 지면보기
양선희
논설위원
이제 사흘 남았다. 이날들이 지나면 2012년은 과거가 된다. 이즈음에 이 해와 함께 ‘과거의 일’로 묻어버리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증오·분노·세대전쟁·막말· 권력형 비리…. 그런데 어느 것도 ‘자살’보다 강하지 않았다. 지난해 이맘때쯤 일어난 대구 중학생 자살로 올 벽두부터 ‘자살’이 화두가 됐기 때문일 거다. 게다가 최근엔 한진중공업 복직 노조원 자살까지….



 자살은 만연했다. 하루 평균 40여 명이 자살하고, 청소년 네 명 중 한 명꼴(23.4%)로 자살을 생각하며(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조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학생들은 학교폭력과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투신했고, 한 동네 빵집 주인은 옆에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며, 공기업 직원은 납품 비리가 발각됐다고 목숨을 끊었다. 자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가족 드라마에서도 자살한 친구 때문에 고민하는 고등학생 이야기가 한 토막 에피소드로 나오고, 툭하면 주인공들이 벼랑 앞에 서거나 약을 먹었다. 우리나라 연예인 중 자살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게 예능 프로에 나와 자신의 자살 위기를 떠벌리는 연예인들로 넘쳤다. 자살 보도 지침에도 불구하고 자살 보도는 줄을 이었다. 대중매체는 자살을 퍼뜨렸다.



 도대체 자살이 뭐길래. 2주 전 열렸던 언론중재위원회 정책심포지엄 주제는 ‘자살에 관한 전통철학적 접근’이었다. 권성 위원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살에 대해 좀 더 깊은 통찰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자경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는 불교철학으로 자살을 설명하며, 이 시대가 생명의 존엄성이 절대가치임을 몰라서라고 했다. 시대정신이 ‘생명경시’라서 자살은 삶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쉽게 선택된다. 그런데 자살은 생애의 업에다 자살 순간 살인의 진심(嗔心)까지 더해져 다음 생의 고(苦)는 지금보다 더해진다고 했다. 자살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성기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는 내세관이 없는 유교에선 도를 깨치는 삶이 중요하다는 삶의 철학만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의(義)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중시했다. 의로움을 위해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고, 그런 이들은 의인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중학생이 학교폭력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네 빵집 주인은 대기업 빵집을 고발하면서, 노동자가 회사를 증오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우리 사회의 자살이 사회문제와 얽혀 있는 것은 이 같은 유교적 뿌리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단다. 이런 죽음을 산 자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열사로, 의사로 만들며 이용한다.



 그런데 유교에선 잘 죽기 위해서라도 충실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생취의는 대마도에서 “왜놈 땅에서 나는 것은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를 지킨 최익현 선생 같은 죽음을 말한다. 분노와 좌절을 못이겨 죽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사생취의가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작금의 자살 현상에 대해 철학도 답을 주지 못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았다. 대구 중학생과 한진중공업 노조원의 유서를 반복해 읽었다. 절망적이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당하는 자녀를 안전하게 폭력에서 구해내는 방법은 있는가. 월급을 받지 못하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소시민이 일은 없고 빚더미에 앉아 있다면 어디로 도망쳐야 하나. 낙인 찍히면 끝장이고, 패자는 갈 곳이 없고, ‘뗑깡’쓸 힘이라도 없으면 밟힐 거라는 강박은 무시무시했다. 나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기운 빠지지만 이런 단어만 떠올랐다. 염치·순리·관용·동감·상부상조·측은지심…. 이젠 진부해진 이런 말을 잊고 산 게 우리 삶을 더욱 팍팍하게 한 건 아닐까. 이런 ‘옛 감정’들이라도 복원하면 삶도 조금은 순해지지 않을까. 내년은 더 어려울 거다. 그 고단한 삶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이웃을 향해 푸근한 마음 갖기 실험이라도 하는 게 그나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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