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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달, 고향 산천을 비추네

중앙일보 2012.12.28 00:29 종합 23면 지면보기
미국 스미스소니언 산하 허시혼미술관·삼성미술관 등 몇몇 기관서 대여한 외에 전시작 대부분은 작가 소장품이었다. 미국서 허드렛일로 연명하며 팔리지 않는 작품의 전업작가로 활동한 임충섭(71)에게 미술은 처마에 깃드는 것과도 같았을 터다. 처마는 안과 밖의 중간지대니까. 임씨가 자신의 신작 ‘월인천지’에 들어가 앉았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월인천강(月印千江), 달이 모든 강물에 비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모든 이들의 마음에 깃드는 것을 의미한다. 달은 하나이나 달빛이 수천 개의 강에 고루 비치듯, 부처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중생을 널리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조선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인 1446년 지은 찬불가 ‘월인천강지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설치작가 임충섭 개인전



 부처님의 자비를 뜻하는 이 말을 두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논쟁 배틀을 벌였다. 퇴계(退溪) 이황(1501∼70)과 고봉(高峯) 기대승(1527∼72)이 벌인 저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다. 퇴계는 하늘의 달 뿐 아니라 천 개의 강에 비춘 달 또한 달이라 했고, 고봉은 물에 비친 달은 달이 아니라 물이라 했다.



 한국 설치미술 1세대 작가인 임충섭(71)은 우연히 이에 대한 글을 접하고 무릎을 쳤다. “20세기의 미학 개념을 16세기 선조들의 철학에서 발견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퇴계의 의견에 공감한 그는 월인천강이라는 주제를 변주해 강이 아닌 땅 위에 비친 달을 주제로 ‘월인천지(月印千地)’ 시리즈를 내놓았다.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내년 2월 24일까지 ‘임충섭: 달, 그리고 월인천지’전을 연다. 설악산 야생화 그림으로 미술 시장 최고 인기 화가가 된 김종학(76)을 지난해 미술관 차원에서 조명한 데 이은 원로 작가 회고전이다.



 임충섭은 서울대 미대 졸업 후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가 동시대 미술과 호흡을 함께해 왔다. 전시엔 드로잉·설치 등 시대별 주요 작품과 미공개작 등 70여 점을 망라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신작 ‘월인천지’다. 미술관의 긴 방 전체를 채운 무채색의 대형 설치 작품이다. 나무틀에 무명실을 잇대 지은 팔각 정 모양 구조물서 시작, 실뭉치로 끝나는 길다란 작품의 한가운데엔 모형 정자가 꿈결처럼 떠 있고, 그 아래로 달이 뜨는 영상이 비친다. 영상 위로 정자 모형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온 마당에 내려앉은 달(月印千地)은 달 위로 떠다니는 정자 그림자로 역설적으로 구현됐다. 미술관의 흰 벽에 그대로 묻어 들어간 듯한 무명실과 달의 미색, 나무색이 고요한 울림을 준다. "실은 자연에 가장 맞닿은 요소로, 실로 정자를 만드는 것은 자연과 문명 사이의 다리를 놓는 행위”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미국서 먹은 햄버거가 2만5000개를 넘습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된장 냄새가 납니다.”



 임 작가는 40년 넘은 외지 생활 속에서도 늘 예술적 영감을 준 것은 고향 충북 진천의 농촌 풍경이라고 했다. 미니멀리즘의 시대 미국서 활동한 작가의 작업에는 비움으로써 채우는 여백의 미가, 당대의 미술 사조인 아상블라주(assemblage·폐품을 모아 새로운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로 분류될 작업에는 뭐 하나 버리지 않고 써먹던 조상들의 지혜가 맞물려 있다. 성인 3000원.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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