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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가 말했다, 2002년의 이운재는 지워라

중앙일보 2012.12.28 00:20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호 전 대전 시티즌 감독(왼쪽)과 이운재가 지난 26일 서울 잠실의 한 호텔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 연수를 준비 중인 이운재는 김 전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다. 김 전 감독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이운재를 발탁했다. [김민규 기자]


은퇴한 ‘거미손’ 이운재(39)가 은사를 찾아가 길을 물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좁고 험한 길을 안내했다.

지도자의 길 조언한 스승



 이운재는 지난 26일 서울 잠실의 한 호텔에서 김호(68) 전 대전 시티즌 감독을 만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김 전 감독은 “그동안 수고했다”며 제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운재는 “은퇴 후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년 1월 중순 스페인과 영국으로 3개월간 지도자 연수를 다녀올 생각”이라고 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바르셀로나(스페인)와 첼시(영국)를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전 감독은 “마음을 비우고 떠나는 게 좋다. 많은 경기를 보면서 선수 생활을 정리하라”고 조언했다. 쓴소리도 했다. “이운재 이름 석 자를 내려놔야 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자신을 낮추지 못하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충고했다.



 이운재는 1994년 김 전 감독의 발탁으로 미국 월드컵 대표팀에 뽑혔다. 무명의 경희대생이었던 그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이운재는 “월드컵에 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경험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고 떠올렸다.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이 된 이운재는 2010년까지 한국의 골문을 지켰다. A매치 통산 132경기(114실점)에 출전했고 월드컵에만 네 번(1994, 2002, 2006, 2010년) 나가 11경기(10실점)를 뛰었다.



 김 전 감독은 2002년 향수를 버리라고 했다. 그는 “2002년 월드컵 세대들은 너무 떠 있다. 바로 감독이 되면서 (지도자로서도) 다 잘하는 줄 알고 있다”며 “운재 너는 한국 축구의 미래인 유소년 선수들부터 차근차근 가르쳐라. 바닥을 보지 못하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따끔하게 말했다.



 이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2년 전 골키퍼 지도자 자격증을 1급까지 다 땄다. 예전에도 감독님이 어린 선수를 가르치라고 하셨지만 그 뜻을 몰랐다”며 “유학을 다녀온 뒤 봉사하는 마음으로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답했다.



 김 전 감독은 1996년 수원 삼성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이운재를 영입했다. 이운재는 “데뷔 첫해 폐결핵으로 고생했지만 감독님은 완쾌될 때까지 기다려줬다”고 회상했다. 이운재가 제 컨디션을 찾았던 1998년 수원은 창단 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둘은 2003년까지 수원에서 13개의 우승컵을 함께 들어올렸다. 이운재는 2010년까지 수원에 남아 7번의 우승을 더 맛봤고, 전남으로 이적해 두 시즌을 뛴 뒤 지난 17일 은퇴를 선언했다.



 이운재는 “김호 감독님은 늘 기본을 강조하셨다. 나도 골키퍼의 기본인 캐칭(catching)을 가장 중시하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내년에는 필드 플레이어 지도자 자격증도 준비할 생각이다. 현재 초등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필드 3급 지도자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자의 열성을 전해들은 김 전 감독은 “한국 축구에는 함흥철(작고) 선생 이후 골키퍼 출신 감독이 거의 없었다. 운재가 그 벽을 깨야 할 것”이라고 덕담했다. 이운재는 “갑자기 은퇴를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감독님께 좋은 말씀을 들었으니 생각을 더 정리해 보겠다”고 스승에게 감사를 전했다.



  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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