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국지·군사교본 탐독 … 조조 꿈꾸지만 유비 닮았죠”

중앙일보 2012.12.21 00:35 종합 42면 지면보기
복싱 선수 김주희가 18일 서울 영등포 거인체육관에서 챔피언 벨트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체육관에서 그는 14년 동안 서러움과 외로움을 달래고, 꿈을 키웠다.


“얼굴에 바셀린을 바를 때 가장 예뻐 보여요.”

여자복싱 통합챔프 김주희



 화장품보다는 바셀린, 순정만화보다는 삼국지연의와 육군 군사교본. 세계 여자복싱 8대 기구 통합챔피언에 오른 김주희(26·거인체육관)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그는 지난 15일 모교인 서울 영등포여고에서 열린 라이트급 8대 기구 통합매치에서 프로이나파 세커른(22·태국)을 10라운드 TKO로 꺾었다. 여자 복싱 사상 처음으로 8대 기구 통합 챔피언이 된 것이다. 18일 영등포 거인체육관에서 만난 김주희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었다. 좁은 거인체육관 사무실에는 그가 모은 챔피언 벨트들이 빛나고 있었다.



 “상처는 괜찮냐”고 묻자 김주희는 활짝 웃는다. “처음도 아닌데요 뭘.” 자신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은 언젤까. “링에 오르기 전이죠.” 김주희는 “복싱에선 얼굴 상처를 막기 위해 경기하기 전 바셀린을 바른다”며 “곰곰 생각하니 친구들이 화장할 때 난 바셀린을 바르더라. 그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다”고 말했다.



 유년의 기억은 온통 잿빛이었다. 어머니는 병든 남편과 두 딸을 두고 집을 나갔다. 김주희의 언니는 주유소에 다니며 가족을 부양했다. 열세 살이던 1999년 복싱을 시작한 김주희에게 거인체육관은 외로움과 서러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정문호 관장은 김주희에게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했다. 그 숙제를 해야 권투를 가르쳐줬다. 정 관장이 그의 손에 쥐어준 책은 삼국지와 육군 군사교본. 삼국지는 50번도 넘게 읽었다고 한다.



 김주희는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과 복싱 선수는 닮은 점이 많다. 어떤 선수는 장비나 여포처럼 막무가내로 덤비고, 계략을 잘 꾸미는 조조와 같은 선수도 있다”며 “치고 빠지는 전술들도 묘하게 닮아 있다. 상대 전술을 읽어야 하고 내 전략은 숨겨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는 삼국지의 어떤 영웅과 닮은 것 같냐’는 질문에 “나는 조조처럼 영리하고 싶은데, 실제론 우유부단한 유비 같다. 나의 장점은 제갈량보다 뛰어난 관장님을 모신 것이다”고 말했다.



 2004년 12월 19일 김주희는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처음엔 내가 잘나서 챔피언이 된 줄 알았는데 8년 동안 타이틀을 지켜오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주변의 도움 없인 지금의 나는 없었다”고 했다.



 그는 2006년 오른쪽 엄지발가락 뼈를 1.5㎝나 잘라냈다. 골수염 때문에 고름이 줄줄 새나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균형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정 관장도 “복싱을 그만 하자”고 했다. 김주희는 정 관장에게 울며 매달렸다. “관장님. 정말 힘들었지만 권투하면서 살 수 있었어요. 저보고 그만두라면 죽으라는 겁니다.”



 김주희는 기자에게 자신의 발을 보여줬다. 여기저기 상처가 깊었다. 발톱이 빠진 곳도 있었다. 그는 오히려 “제 발 예쁘지 않나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매일 힘들게 훈련을 했습니다. 몸이 약해 발톱도 잘 빠졌어요. 잘 견뎌내 준 내 발이 고마워요.”



 김주희는 이 발로 아홉 번째 타이틀을 노린다. 내년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WBA(세계권투협회) 타이틀전이다.



글·사진=김민규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