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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척의 시시각각] K, 대선에 기권하다

중앙일보 2012.12.19 00:22 종합 30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1987년 12월 15일 오후. 바닷바람 넘실대는 인천 연안부두 앞을 한 젊은이가 서성이고 있다. 털실 목도리 밖으로 목을 꺼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대학생 K다.



 K는 다른 젊은이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영종도행 여객선에 오른다. 이제 K가 이튿날 치러지는 13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생애 첫 선거권을 행사할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그들은 배에서 내린 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다. 마을은 이미 컴컴한 밤이다.



 12월 16일 새벽. 민박집에서 토막잠을 잔 K는 초등학교로 향한다. 교실 문에 ‘투표소’ 팻말이 붙어 있다. K와 동행한 두 명은 “공명선거감시단에서 왔다”고 알린 뒤 투표소 한쪽에 자리를 잡는다. K는 혹시 린치라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한 눈빛이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다가온다. “학생, 운동권이지?” “아니요. 투표 참관하려고….”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지만 왠지 쑥스럽다. 투표 마감 후 K는 선관위 직원과 투표함을 들고 통통배에 오른다. 저녁 8시가 다 돼서야 연안부두에 들어온다. 투표함을 개표소에 넘긴 K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개표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 후보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 노곤함에 몸이 무거워진다. 백열등 밑에서 졸고 있던 그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린다. “더 있을 필요 없겠네요. 갑시다.”



 12월 17일. K의 학교에 ‘구로구청 부정선거’ 대자보가 붙는다. 부정투표함으로 보이는 상자가 발견돼 시민·학생들이 개봉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다. 다음날 경찰 진압 과정에서 한 청년이 구청 5층 옥상에서 추락한다. 공명선거감시단원이던 서울대 경영학과 84학번 양원태는 이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다. ‘만일 내가 구로 쪽에서 감시단을 했다면…’. K의 가슴엔 간사스러운 안도감이, 뒤이어 씁쓸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후 25년이 흘렀다. K는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는 양원태(47)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 투표가 왜 중요합니까.



 “음…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네가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고. 지금은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지만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 바쳐 싸웠습니까. 공기만큼 소중한 것이죠.”



 - 요즘 젊은이들은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 아닌가요.



 “그들이 왜 정치를 불신하고 무관심할까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기쁘게 투표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 기성세대의 책임 아닐까요.”



 K는 문득 자신의 물음이 부끄러워졌다. 다섯 명의 직선 대통령이 스쳐가는 사이 내 손으로 우리의 대표를 뽑는다는 열의는 사그라들었다. 대통령제는 짧은 흥분, 긴 환멸로 다가오고 있다. 어느덧 기성세대가 된 소위 ‘386 세대’는 이런 상황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통령과 정부가 그릇된 길로 들어설 때 감시자 역할을 다하는 대신 “정치는 원래 더러우니까” 하고 침을 뱉었던 건 아닐까. 젊은이들의 선거 무관심만 탓했던 건 아닐까.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K의 후배는 폭설을 뚫고 대사관이 있는 베른까지 가서 재외국민 투표를 한 뒤 페이스북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난 내가 지지하는 이가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것도 관뒀고, 세상이 바뀌길 꿈꾼다거나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투표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나 자신을 위해, 앞으로 몇 년 동안 신문 보며 구시렁댈 자격을 내게 부여하기 위해 투표했다.”(김진경)



 K도 어떤 후보가 선출되든 비판할 권리를 얻기 위해 투표소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한파에 집을 나서고 싶지 않을 때를 대비해 노래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 이하이의 ‘1, 2, 3, 4(원 투 스리 포)’다. “아침이 밝는 소리에/ 꽃은 저만치 폈는데/ 여전히 정신 못 차려 왜/ I’m sick and tired 너의 위선에/ 어설픈 liar ooh 이제 좀 꺼져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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