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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선전은 기만전

중앙선데이 2012.12.16 02:24 301호 29면 지면보기
제18대 대통령 선거는 맛으로 따지면 밍밍하다. 큰 그림이나 굵은 쟁점은 찾기 어렵고 자잘한 선심 공약만 난무한다. 판세는 박빙이다. 이럴수록 각 후보 캠프에선 막판 한 방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그래선지 흑색선전과 네거티브는 선거 막판에 기승을 부린다. 진실을 판단하기 어려운 ‘카더라 통신’이 범람한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말이 판친다. 요즘엔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통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진실 여부는 대개 선거가 끝난 다음에나 규명 가능하다. 유권자는 국민통합·행복, 나라 안전·번영의 방법을 놓고 후보 선택을 고민하고 싶다. 하지만 ‘굿판설·아이패드설’이나 ‘부친 인민군설’ 같은 흑색선전이 그치지 않는다.

원래 흑색선거는 군사전술인 기만전에서 비롯했다. 진실을 곧바로 확인하기 어려운 허위 정보를 교묘하게 퍼뜨려 혼란과 오판을 유도함으로써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는 전술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기만전의 극치였다. 연합군이 프랑스 북중부 칼레에 상륙하는 것처럼 소문을 낸 뒤 북서부 노르망디를 침공한 게 대표적인 기만술이다.

약자가 강자 앞에서도 살아남는 수 있는 전술이기도 하다. 당시 약소국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간신히 이긴 소련의 군사사절단은 헬싱키 공항에 내리면서 깜짝 놀랐다. 공중 정찰에서 발견했던 고사포는 페인트 칠한 합판이었고 전투기는 천 조각을 덧씌운 각목이었다. 소련은 이런 줄도 모르고 핀란드의 방위력을 오판해 비행장 폭격을 포기하고, 후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기까지 했다. 무독한 뱀이 독사와 비슷한 색깔과 무늬로 맹독성을 띤 것처럼 위장해 공격을 피하는 자연의 기법이 전쟁에서도 통했다.

비슷한 시기 북아프리카 전선에선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생물학자 휴 코트가 자신이 연구하던 아마존 열대우림 식물의 위장 기법을 전쟁에 십분 활용했다. 휘발유통을 두들겨 가짜 철로를 만들고 검은 천으로 가짜 활주로를 설치했다. 독일군은 가뜩이나 부족한 폭탄을 여기다 퍼부었다. 정작 주요 전력인 대포·전차·장갑차는 모래와 비슷한 색깔로 도색해 폭격을 피했다. 멀리서 보면 지형지물과 쉽게 구분되지 않는 이런 위장 무늬는 오늘날 다양하게 진화했다. 최근 한국군이 도입한 디지털 패턴의 군복도 그중 하나다.

선거에서도 진실과 흑색선전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1970년대 금권선거가 판치던 시절엔 반대 성향의 유권자 집에 상대 후보 명의의 선물을 줬다가 옆집에 갈 게 잘못 왔다며 빼앗아 감으로써 반발 투표를 유도하는 기막힌 수법도 있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아무개에게 들었는데…’ ‘미국에 사는 친척이 알려주는데…’라며 각종 유언비어의 공신력을 높이는 기법도 한때는 통했다. 하지만 흑색선전은 실정법 위반임은 물론 도덕적으로도 사악하다.

하지만 요즘엔 인터넷부터 SNS까지 언제 어디에서든 감시의 눈이 번득인다. 댓글을 여론으로 보지도 않는다. 속아 넘어가기는커녕 금세 수법을 알아차리고 비웃는 사람도 상당수다. 이번 선거를 마지막으로 한국 정치에서 흑색선거가 사그라지기를 기대한다. 유권자는 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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