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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죽음·부인 외도…50대 '천재음악가' 결국

온라인 중앙일보 2012.12.16 02:22
유대인의 음악적 소양과 재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작곡가·지휘자·연주자 중 유대인이 많다. 오랜 유랑 생활을 통해 받은 설움과 울분이 이들의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특히 현악기 연주에 있어 많은 대가를 많이 배출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기돈 크레머, 슐로모 민츠, 길 샤함, 조슈아 벨, 막심 벵게로프 등은 요즘 잘나가는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다. 나탈리아 구트만, 미샤 마이스키, 오프라 하노이, 맷 하이모비치는 유명 유대인 첼리스트다. 제임스 레바인, 앙드레 프레빈, 로린 마젤, 다니엘 바렌보임, 마리스 얀손스, 세이먼 비슈코프 등 유명 지휘자 중 상당수가 유대인이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2011년은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사진)의 100주기였다. 이 천재 작곡가 추모의 해를 맞아 한국을 위시한 세계 클래식악단들은 경쟁적으로 말러 연주회를 열었다.



네 살부터 재능 교향곡의 기존 틀 파괴



말러는 1860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헤미아(현 체코) 칼리슈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다자녀 가정의 둘째다. 이후 가족은 인근 모라비아 지역 이글라우(현 질라바)로 이주했다. 말러는 네 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부모는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1875년 빈으로 가 빈 음악원을 다녔다. 이어 빈 대학에 진학해 작곡과 화성을 공부했다. 작곡가 후고 볼프는 절친한 급우였다. 말러는 당대 대작곡가 안톤 브루크너에게서 대위법을 비롯한 작곡 기법도 배웠다. 철학가 프리드리히 니체와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에도 관심이 많았다.



1880년 바트 할 음악당에서 시작한 그의 지휘자 경력은 독일 카셀 왕립극장, 프라하 극장, 라이프치히 시립극장, 부다페스트 왕립 가극장, 함부르크 시립극장으로 이어졌다. 그는 빈 궁정극장 지휘자가 되고자 했으나 유대인을 배척하던 당시 빈 상류사회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897년 어렵사리 궁정극장 지휘자 겸 예술 감독으로 취임했다.



지휘자 말러는 악보대로 충실하게 연주하는 원론주의자였다. 그러나 단원에게 무례하게 대해 인기가 없었다. 다음해 빈 관현악단 지휘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작곡에 몰두했다. 말러는 입신을 위해 개종했지만 유럽 상류사회엔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차별 기류가 뚜렷했다. 그래서 190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악단, 그리고 뉴욕 필하모닉을 차례로 지휘했다. 여기서도 또 새로운 벽에 걸렸다. 이탈리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등장이다. 뉴욕에서 심장병을 얻은 그는 파리에 가서 혈청을 수혈했지만 별 효과가 없어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 1911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러는 생전에 지휘자론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지만 작곡가론 각광을 받지 못했다. 특히 1889년 12월 자신의 지휘로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된 교향곡 1번 ‘거인’은 냉대를 받았다. 1악장은 대자연의 생기, 2악장은 농촌의 평온함으로 순탄하게 나가다 3악장은 장송 행진곡과 소음이 섞인 정신분열증을 보이는가 하면 4악장에 가서는 기괴한 불협화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묘사하다 마지막으로 금관악기군이 승리의 팡파르를 울린다. 지금은 이 곡이 많은 말러 매니어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세계 유수 악단에 의해 자주 연주되지만 베토벤과 브람스에 익숙했던 당시 유럽 음악계는 이 곡을 ‘폭력적 광인의 곡’으로 폄하했다.



말러는 평생 가곡 42개, 교향곡 9개, 그리고 교향곡과 연가곡을 결합한 ‘대지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미완성 교향곡 10번은 사위인 에른스트 크세넥과 후배 음악인이 완성했다. 말러는 교향곡의 기존 틀을 과감하게 파괴했다. 교향곡은 보통 4악장 45~50분 형식이지만 그의 교향곡은 대체로 길다. 교향곡 3번은 95분이 넘는다. 그리고 교향곡에 성악과 합창을 혼합했다. 곡에 따라 민속 악기를 넣었고 목관·금관 악기 주자 숫자도 늘렸다. 120명 이상의 대편성악단이 연주한다. 1910년 9월 뮌헨에서 초연된 교향곡 8번은 독창자 8명, 합창자 858명, 연주자 171명 등 무려 1000명이 넘는 인원이 연주에 참여해 일명 ‘천인 교향곡’으로 불린다. 그리고 군데군데 보헤미안적 선율과 유대 전통음악(교향곡 4번 1악장 도입부 등)의 음률을 집어넣었다. 교향곡 2번과 5번은 고전음악풍이지만 7번 ‘밤의 노래’는 현대음악에 가깝다.



가족의 불행과 콤플렉스로 불우한 삶



말러는 평생 가는 곳마다 나그네로 살았다. 오스트리아에선 보헤미아인, 독일에선 오스트리아인, 세계에서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사후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문화·예술 흥융기인 ‘아름다운 시절’(La Belle Epoque)의 ‘빈 3천재’(말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심리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지만 살아서는 어디에서나 2등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곡은 울분, 수난, 밤, 비극, 방황, 죽음 등 음울한 염세적 주제로 이뤄졌다. 가족의 불행, 첫딸의 죽음, 젊은 부인의 외도, 유대인 콤플렉스, 정신분열적 광기 등 평생 불행과 정신 불안 속에서 불멸에 대한 환상을 안고 살았다.



말러의 음악은 훗날 유대인 현대음악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 브루노 발터-오토 클렘페러-게오르그 솔티-레너드 번스타인-마이클 틸슨 토머스 등 유명 유대인 지휘자에 의해 말러 음악 연주자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천재 작곡가 말러는 내면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파괴적 열정으로 세계 음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또한 자신이 생전에 받은 냉대를 오늘날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넘치는 사랑으로 보상받고 있다.



박재선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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