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식 뛰어넘는 상술로 재계 다크호스 된 최남·박흥식

중앙선데이 2012.12.16 01:41 301호 26면 지면보기
이상범 화백의 만평. 흥성하는 일본인들에 비해 비참한 조선 사람들의 처지가 잘 묘사돼 있다.
대일 항쟁기 때 일본인 상인들이 터를 잡은 곳은 혼마치(本町:충무로) 진고개 일대였다. 언론인 정수일(鄭秀日)은 별건곤 1929년 9월호의 ‘진고개, 서울맛·서울 정조(情調)’라는 글에서 “서울 구경 온 시골사람들이 갑이나 을을 막론하고 평생 소원이 ‘진고개 가서 그 좋은 물건이나 맛있는 것을 사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땅이 질어서 니현(泥峴)이라고 불렸던 진고개는 원래 조선 선비들의 거주지여서 비가 오면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선비를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⑦ 백화점 부자

고종 21년(1884) 일본이 남산 밑의 왜성대(倭城臺:중구 예장동~회현동)로 공사관을 옮긴 뒤 일본인들이 밀려들면서 터줏대감이었던 조선 선비들을 밀어냈다. 왜성대는 임란 때 왜장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가 주둔했던 곳으로서 을사늑약 후 조선통감부를 설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8C50>臣秀吉)의 숙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혼마치 일대에 일본 최대의 백화점인 미쓰코시(三越:현 신세계 자리)를 비롯해 조지야(丁子屋:현재 롯데 영플라자), 미카나이(三中井), 히라다(平田) 등 식민지 시대 4대 백화점이 들어섰다. 1930년대 진고개에 들어서면 조선이 아닌 일본으로 여행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화점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1 화신백화점. 화재를 딛고 1937년 재건축한 화신백화점에 대해 식민지 한인들은 일본의 백화점에 맞서는 상징으로도 생각했다. 2 신세계백화점. 일제 때는 일본 최대의 백화점인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었다.
일본 상인들은 고객으로 일본인은 물론 한인도 유혹했다. 정수일은 앞의 별건곤에서 “한번 그네들의 상점에 들어서면 사람의 간장까지 녹여 없앨 듯이 친절하고 정다운 일본인 상점원들의 태도에 다시 마음과 정신이 끌리고…”라며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상술에 대해 서술했다. 대일 항쟁기 때 일본인 상인들은 남촌(南村)이라 불렸던 혼마치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한국 상인들은 종로 중심의 북촌(北村)이 중심으로서 정확하게 갈라졌다.

그러나 우세한 자본력의 일본인 상점들이 점차 북촌까지 잠식하면서 한국인 상점들은 동대문과 서대문 쪽으로 밀려나는 형세였다. 정수일은 “그곳(일본인 백화점)에 조선 동포의 발이 잦아지고 수효가 느는 정비례(正比例)로 종로거리 우리네 상점의 파산이 늘고 우리 살림은 자꾸 줄어든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의 친절한 상술과는 달리 조선 상인들의 경우 “물건 파오” 하면 “여기 있소”라는 재래식(在來式) 방식인 것도 파산의 한 원인이라는 뜻이다.

3 화신백화점을 세운 박흥식. 평안도 출신의 신흥재벌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최남, 은행원 하며 인사동에 잡화점 열어
별건곤 1930년 12월호에서 이상범(李象範) 화백은 ‘세모가두(歲暮街頭)의 불경기 풍경(2)’이란 만평(漫評·위 사진)을 실었는데, 모두 네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1)아! 최후의 비명’은 망해서 경매에 붙여진 조선 상점의 풍경이고, ‘2)견이불식(見而不食:보고도 먹지 못함)’은 차압당한 쌀 앞에서 굶고 있는 조선 농민들을 묘사했고, ‘3)폐허의 자취’에서는 손님이 없어서 거미줄 치고 있는 조선 상가 풍경을 그렸다. 반면 ‘4)조선사람들은 삼월(三越:미쓰코시)·정자(丁子:조지야)·평전(平田:히라다)으로만 연신 돌아든다. 헤-헤-망(亡)헤야’라면서 ‘대매출(大賣出)’이란 큰 간판을 단 일본인 백화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인파의 모습을 묘사했다.

언론인 신태익(申泰翊)이 삼천리 1932년 1월호에서 “남풍이 시시각각 북으로 북으로 몰려 들어와서 북촌의 상계(商界)란 것이 잔영조차 점점 희미해 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현상”이라고 말한 게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조선 상계(商界)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두 상인이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의 최남(崔楠)과 화신상회(和信商會)의 박흥식(朴興植)이었다. 당초에는 신태익이 “화신상회나 동아부인상회를 가리켜서 백화점이라고 부를 용기가 안 난다”고 언급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여러 가지 상식을 파괴하는 독특한 상술로 재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1895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최남은 편모(偏母)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라면서 보성(普成)중학교를 겨우 마쳤다. 그후 금광왕의 꿈을 안고 일본의 아키타 광산(鑛産)학교에 다니다가 귀국해서 광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장공성백만골(一將功成百萬骨:한 장수의 공은 백만 병사의 유골이 만든 것)’이란 말처럼 누구나 최창학·방응모·김태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산을 그만둔 최남은 운 좋게 조선상업은행에 들어가 은행원이 되었다. 최남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사동 입구에 덕원잡화상(德元雜貨商)을 열고 투잡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누이동생이, 밤에는 동대문 지점에서 퇴근한 최남이 운영했다. 그러다 최남은 남들이 선망하던 직장인 은행에 사표를 내고 상업에 전념했다. 최태익은 “남이 생각하지 못한 점에 착안하는 것이 최남의 특장(特長)”이라고 평가했는데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 다른 지역 4, 5곳에도 덕원상회 지점을 냈으며 경영난에 빠진 동아부인상회를 인수한 후에는 대구·광주·순천 등 지방 7~8곳에도 지점을 내는 새로운 경영기법을 선보였다. 배후에 권모(權某)라는 자산가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최남은 단순히 남의 도움으로 성공한 상인이 아니었다. 그는 1934년 9월호 삼천리에 직접 쓴 ‘백화점·연쇄점의 대항책’이란 글에서 덕원상회의 성공 비결을 공개했는데 “그때 서울 상인치고 누구 하나 직접 사입(仕入:구매)하는 이는 없이 모두 진고개 상인(일본 상인)들에게서 도매(都賣) 맡아다가 파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나는) 사입을 싸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대판(大阪:오사카)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다. 중간 단계를 배제한 직접구매로 단가를 낮춘 것이 성공 배경이란 뜻이다.

그러나 종로의 조선 상인들은 최남을 배척했다. 소매상조합(小賣商組合)에서 최남을 제외시킨 것이다. 그것이 최남에게는 전화위복이 돼 1926년 순종의 인산 때 기록적 매출을 올렸다. 순종 인산 때 포목상조합(布木商組合)·소매상조합 같은 단체에 대여(大輿)를 멜 자격을 주는 바람에 덕원상점이나 동아부인상점 점원들은 배제되었다. 전 시가가 철시한 인산날 심심해진 최남이 상점 한 귀퉁이를 열자 지방에서 올라온 조문객들이 밀려들어 삽시간에 4000여원의 매상을 올렸다. 금곡(金谷)까지 다녀온 다른 상회 점원들의 발이 부르터서 문을 닫은 다음날에도 최남의 상점만 열었는데, 동아부인상회에서만 하루에 2만4000원이란 기록적 매출을 올렸다.

박흥식, 화신百 화재 뒤 최신 건물로 재건
최남은 일본인 백화점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1931년 종로에 동아(東亞)백화점을 열었다. 민영휘의 셋째아들 민규식 소유의 최신식 4층 건물을 화신상회의 박흥식과 경쟁 끝에 연간 2만 원에 임대했다. 최남은 백화점 점원 200여 명 중 70∼80명은 여점원으로 충당했다. 그래서 문방구 판매대의 여직원과 도쿄 유학생 출신이 혼인까지 하는 로맨스를 낳아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2년 7월 조선호텔에서 박흥식과 회동한 최남은 동아백화점을 박흥식에게 매도하겠다고 발표해 큰 충격을 주었다. 박흥식은 이때 겨우 29세였다. 박흥식의 조부는 평안도 용강의 천석꾼이었지만 부친 때는 겨우 먹고살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해진다. 용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곡상과 인쇄업을 하던 박흥식은 24세 때 서울로 올라와 황금정(黃金町:을지로)에 선일지물회사(鮮一紙物會社)를 설립하면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태익은 동아백화점을 매도한 이유에 대해 1년에 7만원 정도 손해를 보자 후원자 권모(權某)가 손을 뗐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여점원 덕분에 사람은 북적거렸지만 매상은 시원찮았던 것이다. 신태익은 ‘박흥식의 배후에는 은행이 있다’고 추정했다. 은행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한 식산(殖産)은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흥식은 삼천리 1935년 7월호에 ‘내가 보는 백화점과 연쇄점(我觀百貨店과 連鎖店)’이란 글에서 자신의 배후에 관한 소문을 모두 낭설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이후 박흥식의 화신백화점은 승승장구해서 1933년에는 320명의 점원에 하루 평균 1만 명이 찾아 적을 때는 3000∼4000원, 많을 때는 1만7000원까지 팔면서 ‘근대 백화점의 왕’이라고 불렸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과 전국적 프랜차이즈 회사인 화신연쇄점, 선일지물회사, 대동흥업(大同興業)주식회사, 선광인쇄(鮮光印刷)회사 등으로 계열사를 확대하면서 재벌로 떠올랐다.

1935년 화신백화점 대화재로 5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1937년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최신식 건물을 준공해 남촌의 일본인 백화점에 당당히 맞서면서 “조선에선 박흥식이 실업가로는 제1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박흥식은 미모의 부인 계씨(桂氏)와 재혼했는데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주례에다 혼인식 장소가 비행기여서 다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박흥식은 계동에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조양절충(朝洋折衷)의 화려한 저택을 지었다. 그의 저택에는 자동차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일제가 군국주의로 치닫던 1940년대에는 동양척식회사 감사가 되고 조선비행기회사를 설립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에 구속되기도 했다. 군수산업으로 성장하려 했던 식민지 기업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셈이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