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활자인간 vs 전자인간… 실험은 계속된다

중앙선데이 2012.12.16 01:37 301호 27면 지면보기
연재의 마지막에 왔다. 지난 9회의 연재를 통해 서양과 동양 북디자이너들의 삶과 작품을 살펴보았다. 방대한 동서양의 북디자인 역사와 디자이너 개개인이 기울였을 심혈을 상상해 본다면 이 연재는 사실상 단편적 북디자인 투어리즘에 가까웠다.

시대를 비추는 북디자인 ⑩ 연재를 마치며

관광지가 그 주변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대변하지 못하듯이 9명의 북디자이너와 작품 또한 전체 북디자인계의 어떤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엔 무리다. 그래도 지난 연재가 북디자이너와 대중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했기를, 그래서 조금이나마 북디자인이란 행위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정의 끝에 다다른 지금. 우리는 다시금 우리 주변의 북디자인을 현재의 눈으로 살펴볼 때다. 여행의 궁극적 종착지는 바로 각자의 내면이 되어야 하듯이.

현재 한국의 북디자인계는 활자인간과 전자인간 사이의 기로에 놓여 있다. 세계 출판계의 공룡이라 할 수 있는 펭귄 그룹과 랜덤하우스 그룹이 합병을 발표했을 때 출판 및 북디자인계는 한 번의 급물살을 탔다. 애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전자책이라는 개념을 정착시켰고 ‘자가’ 출판도 가능해졌다. 이런 와중에 국내 문학 관련 출판사들은 세계문학전집을 말끔한 북디자인으로 재포장해 앞다퉈 낸다. 출판과 북디자인 ‘시장’에 재빠르게 대처하는 판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19세기 윌리엄 모리스 식의 예술 부흥 운동을 연상케 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래픽디자이너 슬기와 민 듀오가 만드는 책들은 국내 북디자인계에서 그 입지가 독보적이다. 사진가 이득영의 Two Faces(2010·사진1)는 앞뒤의 표지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양방향으로 보는 책이다), 사진가 백승우의 작품집 아무도 사진을 읽지 않는다(2011)는 표지에 제목이 없다. 대신 사진의 프레임을 연상케 하는 눌린 자국만이 있을 뿐이다. 불친절하지만 책 제목을 제대로 풀어낸 디자인이다. 이들의 첫 저작물인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2008) 또한 첫눈엔 기이하다. 상하좌우로 돌려가며 읽어야만 온전히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북디자인엔 기존 책의 형식을 뒤집는 날카로움과 위트가 있다.

디자이너 박연주의 사진집 중심의 북디자인도 주목할 만하다. 신문 형식을 차용한 백승우의 Utopia/Blow Up(2011), 미술가 박종빈의 작품집인 Into The Membrane(2011·사진2)은 국내 사진책 디자인계엔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좋은 사진집 디자인엔 디자인 그 이상의 기획력과 편집력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사진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박연주의 사진집 디자인은 국내 척박한 사진집 시장에 보기 드문 좋은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정갈한 디자인에다 종이, 제본에 세심하게 신경 쓴 점들이 돋보인다.

국내의 대표적인 북디자이너 중 한 명인 안지미는 ‘사람도서관’ 시리즈를 디자인하고 있다. 그중 한 권인 안철수를 읽다(2012·사진3)에서 안지미는 특색 있는 한글 타이포그래피 실험을 전개했다. 그녀는 “한 개인의 삶은 마치 벽돌을 한 장 한 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블록의 조합으로 서체가 완성되는 형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내지에서도 이어지는 독특한 본문 조판.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유권자로서 안철수에게 바라는 바를 드러내기 위해 표현주의적 색채가 강한 본문 디자인을 전개했다. 안 전 후보에 대한 디자이너의 생각을 서체로 보여준 것이다. 미술가 이부록과 협업하기도 하는 그녀는 현대미술의 어법으로서 북디자인을 차용하기도 한다. 책과 북디자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발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북디자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획물이자 디자이너 개인이 완성한 진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은 책의 전통적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꾀한다. 이 때문에 기성 출판계가 선보였던 북디자인과 차별화된 노선을 택한다. 디지털 시대 북디자인이 처한 상황을 현대미술과의 접점을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다. 그 젊은 기운은 홍대앞 서점 ‘북소사이어티’ ‘유어마인드’ ‘땡스북스’에서 만나볼 수 있고, 소규모 출판 전시회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도 그 열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생동하는 젊은 열기 속에서 북디자인 역사의 한 장이 열리려고 한다. 민음사 박맹호(79) 회장의 자서전 출간 소식이다. 국내 북디자인의 산파 역할을 한 민음사. 박 회장은 자서전에서 국내 1세대 북디자이너인 정병규를 거론한다. 정병규가 1977년 디자인한 한수산의 부초는 국내에서 북디자인 개념이 처음 적용된 책이다.

역사란 기술되지 않으면 망각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북디자인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은 아직까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계의 산증인인 박 회장의 자서전 출간은 북디자인계에 관한 소중한 첫 기록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제야 한국의 북디자인 역사를 써나갈 토대가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이 훈훈한 소식과 함께 연재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 기쁘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