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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9) 다이춘펑 "인생은 도박"

중앙일보 2012.12.09 18:45



다이춘펑“인생은 도박” … 장제스 만나 ‘다이리’로 개명

1967년 7월 26일, 전 총통대리 리쭝런(李宗仁·이종인)과 지수이탄(積水潭)의원 간호사 후여우쑹(胡友宋·호우송)의 간소한 결혼식이 열렸다. 리쭝런의 수중에 중공 통전부(統一戰線部)로부터 받은 돈이 제법 있다 보니, 후여우쑹은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다. “젊은 애가 늙은이의 재산에 눈이 멀었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배우의 사생아답다.” 마흔여덟 살 차이 나는 노인과의 결혼이다 보니 나올 수 있는 얘기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69년 1월 30일, 리쭝런이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 날 저우언라이의 행동이 눈길을 끌었다. 후여우쑹의 손을 잡고 간곡히 말했다. “국가가 보살펴 줄 테니 난감해 하지 마라. 캐나다에 있는 네 엄마도 건강하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열린 아세아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 장산(江山)에 한번 가봐라.” 후여우쑹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1897년 5월 28일, 저장(浙江)성 장산의 다이(戴)씨 집안에 사내아이가 한 명 태어났다. 소녀 시절 모친은 봄바람을 좋아했다. 결혼 첫날부터 큰애 이름은 내가 지어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집안 어른들과 남편이 반대를 하건 말건 춘펑(春風·춘풍)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소년 춘펑은 엄마 말이라면 뭐든지 복종했다. 훗날 국·공 양당의 고관대작과 모든 중국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후에도 모친 앞에만 가면 거짓말하다 들킨 애처럼 쩔쩔맸다.



저장성 최고의 중학이던 성립 제1중학 시절, 별생각 없이 내뱉은 담임선생의 한마디가 춘펑의 인생을 결정했다. “인생은 도박이다.”



아무리 말 같지 않은 소리라도 선생의 입에서 나왔다 하면 유학자들이 성현의 어록을 대하듯 할 그런 나이였다. 고지식한 춘펑은 도박에 눈을 떴다. 학교는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온종일 도박장을 기웃거렸지만 복장은 항상 청결했다. 손이 예쁘다며 만져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도박판에서 끌려온 춘펑은 교장과 선생에게 대들었다. “선생님이 인생은 도박이라고 했습니다.” 그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양복 한 벌 사 입고 고향을 떠났다. 엄마가 상하이에 있는 친정조카 주소를 알려줬다. 열일곱 살 때였다.



신혼이었던 외사촌은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편집 일을 보고 있었다. 상무인서관은 보통 직장이 아니었다. 미국 전역의 출판량보다 더 많은 책을 발행하던 당대 최고의 출판기구였다. 춘펑은 외사촌 부부의 신혼방 마루바닥에서 눈치 잠을 자며 상하이 생활을 시작했다. 외사촌의 신혼부인에겐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춘펑은 사촌이 출근하면 인적 없는 강가에 나가 양복을 빨았다. 옷이 마를 때까지 쭈그리고 눈을 붙였다. 1923년, 26살이 될 때까지 그랬다. 항상 깨끗한 옷 입고 도박장 부근을 배회했다. 과일장수 출신 두웨셩(杜月笙·두월생)이 지하사회(靑幇)에서 두각을 나타낼 무렵이었다. 몇 년 후 중국 역사상 최대의 특무조직과 상하이의 비밀결사를 장악하게 되는 두 사람은 만나는 순간 서로를 알아봤다.



‘상하이증권교역소’야말로 천하 제1의 도박장이었다. 이곳에서 춘펑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라는 증권브로커를 만났다. 뭔가 큰일 할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평생 이 사람의 삿갓(笠)이 되겠다”며 개명했다. 다이리(戴笠·대립), 발음하기도 쉬웠다.





이 무렵 상하이의 이름없는 철도원 딸 후디에(胡蝶·호접)가 영화학원에 입학했다.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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