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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가 후려치기, 삥 뜯기…해도 너무한 '형님'

온라인 중앙일보 2012.12.09 02:00



대기업이 중소기업 기술 탈취, 머나먼 상생

“납품 단가 후려치기에다, 이제 기술을 빼앗기까지 하다니….”

요즘 중소기업 다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대기업을 향해 쏟아내는 불만이다. 얼마 전 롯데 정보기술(IT) 계열사가 협력회사의 기술을 빼돌리다 적발된 사건을 두고 하는 얘기다. 사실 원자재 값은 뛰는데 납품 단가는 내려야 하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대기업의 협력업체들은 일감이 끊길까 봐 싫은 내색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기 일쑤다. 국내외 불황이 내년까지 이어진다는 소식에 대기업의 사업축소·비용절감 후폭풍이 불지 않을까 걱정이다. 동반성장과 공생발전 구호에서 경제민주화 논란까지 요란하지만 협력업체를 옥죄는 대기업 거래관행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연간 실적 평가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원청업체 간부들의 팍팍한 거래 자세가 지양되지 않는 한 상생(相生) 경영은 요원하다는 비관론도 있다.



“대기업 기술 유출 경험” 12.5%

3일 서울 역삼동의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수사대는 이날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의 운영프로그램을 개발한 중소기업 A사의 핵심 기술을 훔쳐 74억원의 피해를 입힌 혐의로 롯데PSNET의 김모(45) 대표 등 세 명을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밝혔다. 롯데PSNET이 전국 5000여 대의 ATM 프로그램을 2년간 제공하던 A사에 기술을 넘기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파견 직원의 노트북에서 소스코드(원천기술)를 몰래 빼냈다는 것이다. 롯데는 훔친 프로그램을 변형시켜 쓰려다가 에러가 나자, 다음 번 입찰에서 A사를 떨어뜨렸다. 김 대표는 검찰 조사에서 1년에 25억∼30억원가량 드는 ATM 프로그램 관련 비용을 아껴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롯데 측은 당초 계약 때 프로그램 공동개발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A사와 오해가 생겼다고 해명했다.



경찰청 외사수사과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검거한 산업기술 유출자 278명 중 동반성장 침해형 기술탈취 사범이 40명(전체의 14%)에 달했다. 대기업이 사업영역 확장 과정에서 협력업체의 기술을 가로채는 경우다. 이재훈 외사수사계장은 대기업 B사가 증권거래 중개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수주하려고 중소기업 C사의 인력을 스카우트해 영업비밀을 빼간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 조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2009∼11년 대기업에 기술 유출 피해를 본 중소업체는 12.5%에 달했다. 기술 유출은 핵심 인력 스카우트(42.2%), 복사 및 절취(39.1%)에 의해 주로 일어난다. 최용원 기획조정부장은 기술 유출이 사람에 의해 일어나서 확인이 어려운 데다 조사대상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의 눈 밖에 날까 봐 오히려 이를 숨기려 해서 실제 기술 유출은 이보다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방법도 점점 교묘해진다. 한 중소 기술업체의 윤모 대표는 대기업들은 흔히 귀사의 기술을 이해해야 우리가 만드는 최종 제품을 고객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팔 수 있다고 하면서 기술 공유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말이 공유지 사실상 내놓으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이 기술 당신들 것 맞나, 맞다면 왜 공개하지 않나 하는 식으로 압박한다. 그는 납품 한 번 해보려고 기술을 건네주는 순간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된다고 털어놨다.



첨단 기술의 산실로 꼽히는 소프트웨어(SW) 관련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노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정이 더 열악하다. 8년째 한 통신업체와 특허침해 소송 중인 서오텔레콤, 수년간 길러온 핵심 인력을 거래하던 IT 대기업에 빼앗겨 회사 존립이 위태롭다는 한 소프트웨어 업체가 그렇다. 아예 직원들을 대기업 사업장에 출퇴근시킬 정도로 충성을 다하지만 보수나 용역비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되레 기술이나 특허권을 넘기라는 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해외 박사 등 고급 엔지니어를 둔 반도체 디자인 C사의 김모 실장은 투입 인력 대비 시간(man-month) 기준으로 용역료가 책정된다. 월급 많이 나가는 고급 인력도 똑같은 한 사람으로 치는 보상 관행 탓에 대기업과 거래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삥 뜯기(뇌물 공여)나 상품 강매도 여전하다. 최근 짝퉁 위조 부품을 쓴 것으로 드러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비리 복마전으로 불릴 정도로 협력업체를 짓눌렀다. 7일 서울에서 만난 원전 관련 벤처기업의 경영진은 한수원의 횡포를 조심스레 털어놨다. 한수원에 물건을 대려면 말단 직원부터 금품을 상납하는 경우가 적잖았어요. 첨단기술력으로 이름난 우리 회사도 만나주지 않아 금품을 제공하고야 납품업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대형 시행사들이 하도급 계약 조건으로 4억원 상당의 골프장 회원권을 사도록 강요한 사실도 최근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났다.

정부나 정치권이 ‘하도급 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강화할 움직임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공정거래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중소기업연구원 동반성장실의 박승찬 부장은 하도급법 위반 등 불공정 거래 때 공정거래위원회 이외에도 중소기업청이나 해당 기업에 고발 권한을 줄 것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쥐어짜낸 실적 인정 말아야”

그토록 부르짖어온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의 길은 왜 이리 멀까. 규제와 처벌도 좋지만 민간기업의 과도한 실적 위주 평가가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 임원이나 간부들은 자리를 보전하려면 실적을 최대한 올려야 하고 이를 위해 협력업체를 핍박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불황도 상생의 적이다. 대기업 원가 절감 스트레스는 자연스레 협력업체 납품단가를 압박한다.



중소기업 역시 대형 납품처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부당거래를 받아들인다.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다.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공정위가 최근 5년간 10대 대기업집단의 하도급법 위반으로 24건을 적발했으나 검찰 고발은 한 건도 없었다.



중소업계도 대기업 협력업체, 또는 정부 지원에 안주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벤처 성공신화로 꼽히는 휴맥스는 셋톱박스 한 우물을 파고 처음부터 해외를 겨냥해 마침내 매출 1조원 가까운 수출 기업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협력업체가 어려우면 산업 생태계가 공멸한다는 의식을 대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진이 가져야 한다. 박승찬 부장은 대기업이나 정부가 협력업체와의 상생 실적을 임원 인사평가 또는 정부지원 평점에 반영하는 등 인센티브 시스템으로 풀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중소기업을 쥐어짜 얻은 실적을 인정하지 않는 내부 감사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원호·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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