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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는 기본, 치매 찾아내고 머리도 좋게 만들죠

중앙선데이 2012.12.09 01:45 300호 8면 지면보기
정재범 엔텔리전트게임즈 대표가 뇌 활성 기능성 게임 ‘토링 소셜’의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다. 전설 속 설인(사스콰치 또는 빅풋)을 형상화한 캐릭터는 게임 속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다. 최정동 기자
컴퓨터·모바일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치매 등 뇌 질환의 초기 증세를 발견하거나, 보통사람들의 인지 능력을 높일 수 있을까.

파워 차세대 ⑬ 뇌 인지 능력 키우는 게임 개발자, 정재범 박사

엔텔리전트게임즈 정재범(38·사진) 대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심리학 박사인 정 대표는 심리학의 최신 연구성과를 담은 ‘기능성 게임’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 회사가 개발한 게임은 ‘중독성을 고리로 매출을 올린다’는 비판을 받는 온라인 게임류가 아니다. 뇌의 기능적 이상을 분석해 낸다. 임상심리학과 뇌과학을 활용한 것이다. 예컨대 치매나 치매 이전의 초기 증상인 MCI(경도 인지 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를 발견할 수 있다. 또 특정한 인지 능력을 활성화할 수도 있도록 고안된 기능성 게임들이다. 정 대표는 이를 ‘뇌활성 기능성 게임(뉴로 스마트 게임)’이라고 이름 지었다.

정재범 대표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게임이건 바둑이건 프로급(사진 왼쪽)의 뇌 활성화 부분이 서로 유사하고, 일반인과는 뚜렷하게 다른 점을 입증해 주목을 받았다. 오른쪽은 토링 소셜 게임의 한 장면. 심리학 연구성과를 배경으로 고안된 게임을 마치면 뇌 반응 속도 등 인지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
기존 슈팅·퍼즐 게임처럼 흥미진진
기능성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첨단 분야다. 게임을 교육의료 목적에 쓰자는 발상은 예전부터 있었다. 단순 오락을 넘어선 이런 게임을 ‘진지한 게임(Serious Game)’이라 부른다. 미국 등에선 이 분야 연구·투자를 상당한 규모로 진행 중이지만, 큰 성공을 거둔 경우는 많지 않다. 기능성을 추구하다 보면 게임의 맛과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엔텔리전트게임즈가 취급하는 인지기능 강화나 심리상담 분야에도 기존 제품이 몇 개 나와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샌프란시스코 대학, 캐나다 맥길 대학이 공동으로 만든 루모시티(www.lumocity.com),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케임브리지 뇌과학(www.cambridgebrainscience.com) 등이다. 하지만 이 게임들은 한눈에 봐도 단순하고 지루한 게 약점이다. 서류로 된 심리상담이나 인지능력 측정용 설문지를 스크린에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 대표는 여기에 게임성, 즉 재미를 더했다. 게임 개발자들의 최고 단계인 다중접속 롤플레잉게임(MMORPG)을 개발·운영한 경험을 갖춘 팀을 가동한 결과다. 엔텔리전트게임즈에는 ‘열혈강호 온라인’ ‘위 온라인’ 등 유명 게임을 개발한 경력을 가진 이가 많다. 이들이 만든 게임은 기존의 슈팅·퍼즐 게임과 견줘도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게임성에 집중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게 전부는 아니다. 재미와 함께 캐릭터의 색상, 모양, 움직임 하나하나에 심리학의 경험과 노하우를 반영하는 게 핵심이다. 정 대표는 “어떤 색상이 임상심리학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무얼 의미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는 일반 게임회사가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움직임의 방향이나 각도 하나하나에 담긴 이런 지식은 단순하게 우리 게임을 보고 베껴선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엔텔리전트게임즈는 창업(2008년 3월) 이후 3년 가까이 연구소처럼 운영돼 왔다. 주요 병원과 협력해 다양한 임상연구를 해 왔다. 병원에서 흔히 쓰는 간이 정신상태 검사(MMSE·Mini Mental State Examination)를 이 회사의 게임으로도 진단·평가할 수 있다. 정 대표는 “게임이 인지 능력을 개선하는 걸 일부 확인했다. 다만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효과가 있을지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 편의 논문이 나왔고 13건의 특허(미국특허 2건)를 출원했다. 이 회사의 연구위원회에는 정 대표의 은사인 고려대 남기춘(심리학) 교수, 고려대 의대 출신의 신경과·재활의학과 전문의인 박건우·편성범·박문호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어릴 땐 게임광, 대학서 심리학 공부
안경을 쓴 정 대표는 영락없는 모범생 스타일이다. 강의실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학자의 풍모다. 실제로 그는 고려대 심리학과 지혜과학연구소,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의 연구교수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심리학과 학부·대학원을 거쳐 2009년 박사학위를 딴 이력서에다 훤칠한 키에 농구가 취미라는 말만 들으면 경쟁이 치열한 정보기술(IT)업계, 그중에서도 게임개발업체의 최고경영자(CEO)라는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 시절 정 대표는 ‘게임에 죽고 사는’ 소년이었다. 오락실용 게임이 한창 보급되던 시절에 정 대표는 “어디 가서 게임하고 있을 네 형을 찾아오라”는 부모님의 호통소리에 형을 찾아 동네를 헤매곤 했다. 그러다 오락실에서 발견한 형 옆에서 함께 게임을 하다 혼나기 일쑤였다. 함께 게임 삼매경에 빠졌던 형은 2000년대 초 게임개발회사 ‘그라비티’의 대표를 거쳐, 지금까지 정 대표의 일을 돕고 있다.

대학 학과를 선택할 때는 고민이 컸다. 사회과학 중에 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심리학이란 게 뇌 구조를 연구하고, 사람 마음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정 대표는 “결과적으로 호기심 가득한 내게 꼭 맞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심리학과에서도 그는 인지신경심리학, 생리심리학 등 비교적 새로운 분야를 탐색했다. 의대와 공동 연구를 하면서 뇌 구조, 신경전달 구조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게 일이었다.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RI)를 활용한 연구가 국내의 의학·심리학계에 도입될 때였다. 융합의 중요성은 당시 연구과정 속에서 체득했다. 정 대표는 “한쪽 분야에서는 당연하고 기본적인 게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인 정 대표는 유학을 갈 기회도 있었다. 2002년 미국 유수 대학으로 유학이 결정됐지만 불행히도 부친상을 당했다. 몇 달 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생각해 유학 꿈을 접어야 했다. 정 대표는 “슬픈 경험이었지만 국내에서 계속 공부하게 된 것도 운명인 것 같다”며 “글로벌 게임 강국인 한국에 남았기 때문에 게임과 심리학의 융합 연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4년께였다. 그는 의대에서 쓰는 실어증 평가도구를 살펴보다가 그 내용이 심리학의 최신 흐름에 비춰 한참 옛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치매·지능 검사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최신 검사 도구를 간단히 게임 형식으로 만들어 봤다. 정 대표는 심리학 전공이었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뤘고 통계 처리에도 능했다. 효과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이때부터 게임을 심리학과 본격적으로 접목해 보겠다는 생각을 키웠다.

정 대표는 “게임과의 접목을 시작하면서 주위에서 ‘왜 심리학 안 하고 게임을 하느냐’ 혹은 ‘왜 게임을 하는 사람이 심리학을 하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게임이 어떤 다른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적용하기에 따라 어느 분야에서든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연구가 주목을 받은 건 2009년이었다. 박사학위 논문 ‘게임의 숙련자와 비숙련자의 뇌활성화 차이: 기능적 자기공명 영상연구’ 덕택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게임 숙련자의 뇌 활성화 부분이 바둑 영재(프로지망 연습생)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게임이건 바둑이건 프로급과 보통사람의 사이에는 뇌 활성화 부분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점도 찾아냈다. 쉽게 말해 시간 낭비 또는 중독자 양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게임이, 두뇌 발달에 도움을 주는 바둑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이 논문이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엔텔리전트게임즈를 창업한 상태였다. 이후 수많은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 뉴로스마트 게임인 ‘토링(ttoring) 소셜’의 개발을 마쳤다.

엔텔리전트게임즈의 기능성 게임 토링 소셜은 내년 2월 페이스북을 타고 전 세계에 서비스될 예정이다. 일단 입소문을 타고 게임이 널리 보급되면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수익모델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물론 성공 여부는 미지수다. 게임이 아무리 좋아도 많은 사람이 실제로 즐길지,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될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다양한 상황에 맞춰 수익모델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굴지의 글로벌 전자기업과 새로운 계약을 추진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이 기업이 내년에 선보일 새로운 개념의 스마트 기기들에 어린이용 기능성 게임(토링 주니어)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의 꿈은 원대하다. 정 대표는 “단순히 최종 소비재인 게임을 파는 게 아니라, 플랫폼 사업자로 자리 잡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토링 소셜 등을 통해 회원을 모은 뒤 이들의 심리분석 결과나 이용자 행태 등의 핵심 자료를 토대로 다양한 분야의 사업과 연결하겠다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카카오톡이 스마트폰 이용자 대부분을 흡수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애니팡 게임 등 외부 개발자와 상생 모델을 갖춰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사업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아이디어 덕분에 외부 투자 유치도 활발하다. 미국 벤처투자회사 퍼시픽하버캐피털이 지난해 투자한 데 이어, 유튜브·페이스북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역임한 미국 벤처투자자 기드온 유(유기돈·41·한국계)와 조 론스데일(30) 미국 팰런티어 테크놀로지 대표도 개인 투자자들이다. 정 대표는 “게임의 긍정적 기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게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는 게 목표”라며 “한국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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