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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재건 리더십 절실한 때… 총알도 날 못 막을 것”

중앙선데이 2012.12.09 01:37 300호 12면 지면보기
아프가니스탄 재선 의원인 파우지아 쿠피(37). 아프간의 마거릿 대처가 되는 게 꿈이다. [애플북스]
파우지아 쿠피(37)는 여성으론 처음 아프가니스탄 국회 하원 부의장에 오른 재선 의원이다. 2005년 하원 의원과 부의장에 선출된 뒤 2010년 하원 의원에 재선됐다.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의 지위가 유난히 낮은 나라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올해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맞아 실시한 조사에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로 아프간을 꼽았다. 세계경제포럼(WEFㆍ다보스포럼)은 2009년 쿠피를 ‘영 글로벌 리더’로 선정하며 “아프간 여성에게 희망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아프간 첫 여성 대통령 꿈꾸는 재선 의원, 파우지아 쿠피

쿠피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1996년 수립된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여성 교육을 금지해 강제 퇴학당했다. 쿠피는 이런 탈레반 정권에 대해 맹공을 퍼붓는 여전사다. 당연히 탈레반엔 그가 눈엣가시다. 그는 요즘도 매달 한 번꼴로 탈레반의 테러 위협 편지를 받는다. 2010년엔 그가 탄 차량이 무차별 총격까지 받았다. 총격 테러를 당한 뒤 그는 출장길에 나설 때마다 13세(슈흐라), 12세(샤하자드)의 두 딸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저축해둔 돈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학교를 다니거라”는 당부를 담았다.

그런 쿠피가 최근 2014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왜 대통령에 도전하는 걸까, 그가 꿈꾸는 아프간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를 묻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성사엔 1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쿠피는 전화 인터뷰에서 “지금까진 탈레반보다 내가 운이 좋았다”며 “전쟁 상처를 딛고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한국이 아프간의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2010년 9월 재선을 위해 자신의 고향인 바다흐샨지역에서 유세 중인 쿠피. 연설을 듣고 있는 대다수가 남성이다.
쿠피의 삶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아프간 북부의 척박한 바다흐샨 지역 출생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문 밖에 버려졌다.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다흐샨의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그는 얼굴에 화상을 입을 때까지 방치됐다.

-어머니가 원망스럽지 않나.
“아니다. 어머니를 이해한다. 나를 낳을 무렵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아이를 이미 일곱이나 낳은 상태였고 아버지는 일곱 번째 아내를 들였던 참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는 것만이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서른 시간 진통 끝에 태어난 게 나였다. 어머니는 날 보자마자 ‘이 아이도 나처럼 힘들게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도 몸을 추스른 후 날 찾아 다시 꼭 안아주셨다.”

어머니는 쿠피의 성장 과정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정치인이었던 쿠피의 아버지가 반군인 무자헤딘 세력에 살해당하자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카불로 이주해 쿠피를 학교에 보냈다. 쿠피는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마거릿 대처를 보면서 꿈을 키웠다. 대학생 쿠피는 96년 퇴학당한 뒤 카불대 강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다. 쿠피 자신도 여성을 위한 비밀 교육 시설을 찾아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배움에 집착한 이유는.
“교육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길거리에 총탄이 날아다녀도 택시를 잡아타고 영어를 배우러 다녔다. 그 덕에 2000년부터 유엔아동기금(UNICEF)에서 아동보호 사무관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지금 의정 활동에서도 교육을 중시한다.”

2001년 미군 공격으로 탈레반이 축출되자 쿠피는 2005년 아프간에서 30여 년 만에 처음 치러진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정계에 나선 동기는.
“아버지가 정치를 한 배경이 있지만 남편의 억울한 죽음이 더 큰 영향을 줬다. 전직 경찰 간부였던 오빠를 잡으러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쳤다가 남편을 대신 끌고 갔다. 2003년이었는데 감옥에서 폐결핵에 걸려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 석방을 호소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체감했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겠다고 느꼈고 방법은 정치란 결론을 얻었다.”

-남성 유권자에겐 어떻게 지지를 호소했나.
“선거사무실로 협박 전화를 거는 남자들이 많았다. ‘우리 집 여자들이 당신에게 투표한다는데 절대로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다’란 엄포를 많이 들었다. 한 번은 어느 작은 마을 모스크(사원)에서 연설이 예정돼 있는데 ‘여성 연설을 들을 수 없다’는 남성들의 반대로 몇 시간을 차에서 기다린 적도 있다. 하지만 연설을 거듭할수록 지지율이 높아졌다. 어떤 남성들은 내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변화가 느껴지니 더 분발할 수 있었다. 2005년 당시 여성 후보는 1800표만 받으면 선출이 확정됐지만 난 남성 후보보다 더 열심히 뛰었다. 결국 모든 후보 중에서 가장 많은 8000표를 얻었다. 여성할당제는 꼭 필요한 장치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을 가볍게 보이도록 만드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뛰었다.”

-의원으로서 어떤 활동에 역점을 두고 있나.
“아동폭력방지위원회 설립을 주도했고 여학생을 위한 학교와 여성을 위한 모스크를 짓는 데 주력했다. 이 인터뷰가 끝나는 대로 교육부 장관을 만나 관련 논의를 할 예정이다.”

-2005년 국회부의장에 출마해 당선됐는데.
“여성도 높은 자리에 올라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모험이긴 했다. 나를 제외하고 10명의 남성이 입후보했는데 다들 계파로 똘똘 뭉쳐 있었다. 돈으로 보상할 테니 중도 사퇴하란 압력을 받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투표 직전 연설에서 승부수를 띄웠다. 아프간을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며 내가 현장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라고 강조했다. 연설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걸 느꼈고 당선됐다.”

-2014년 대통령 선거엔 왜 출마를 결심했나.
“안 될 이유는 뭐냐고 되묻고 싶다. 도전을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의원이 되고 국회 부의장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하미드 카르자이 현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어떤 아프간을 만들고 싶은가.
“어떤 정치인도 지기 위해 출마하진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여성이기 때문에 대통령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여성들에게만 혜택을 제공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아프간의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사랑하기에 나섰다. 아프간엔 지금 강력한 재건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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