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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단상

중앙선데이 2012.12.09 01:30 300호 18면 지면보기
“시간이 뭐예요?”

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우울증과 강박증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빨리 끝내지 못하는 한 환자의 질문이었다.

성격 급한 남편은 어디에 갈 때 항상 꾸물거리는 아내를 재촉하는 사람이지만 막상 자기 자신은 매일 밤늦게 들어와 평생 아내를 기다리게 만든 사람이었다.

부인은 시간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은 몇 분도 기다리지 않고 상대방만 기다리게 만드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일러스트 강일구
똑같은 시간이지만 사람과 장소와 상황에 따라 주관적 경험은 모두 다르다. 특별히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이 무료하거나 단순반복적인 일만 해야 한다면 하루가 길겠지만, 기한에 맞추어 일을 해내야 하거나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간다. 권태기의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지루하지만 사랑에 빠진 연인에겐 1초가 아쉽다. 어린아이에게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지만 앞으로 살날이 많지 않고 추억만 풍성한 노인에겐 시간은 엄청난 속도로 빨리 달아난다.

흘러간 과거에 너무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미래에 대해 불안해해서 병이 생긴 사람들 때문에 시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 순간, 이 자리”에 조금 더 충실해 보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의식 없이 인간이 될 수는 없다. 되돌려 생각하고 앞날을 상상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객관화해 점검하지 않고서는 자기 반성도 자기 발전도 없다.

정신없이 바삐 가는 세월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한 해가 저물 때쯤이면 특히 마음이 더 쓸쓸하고 수수해진다면 아예 멍석 깔고 반성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다시 오지 않을 한 해에 대한 아쉬움을 같은 시대와 공간에 있는 주변 사람들과 나누자는 의도로 송년회나 신년 하례식도 만들어진 것일 게다. 다만 축제와 의식은 끝냄과 시작이라는 규칙성을 선사하는 문화의 근간이지만 의도와 달리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어 문제다. 만약 모임으로 몸과 마음만 더 피폐해진다면 시간에 대해 고요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연말이라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임상에서 환자의 자아 기능이나 의식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검사할 때 시간·장소·사람에 대해 꼭 묻는다. 인간의 의식과 신체가 손상되면 시간 개념도 없는 정신병리는 공간과 운동하는 대상이 없으면 시간이라는 개념 역시 측정하지 못하는 물리학적 현상과 유사하다. 시간이 실재하는 무엇인지, 아니면 의식이 투사하는 무엇인지. 정의 내릴 능력은 없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 세상만사가 서로 연을 맺으며 끊임없이 변해가는 모습은 보인다. 어제 내 행동이 오늘 나와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오늘 내가 한 일들이 내일 여러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어떤 시간도 나를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인과관계로 엮여 끊을 순 없지만 항상 있는 것도 아닌(非斷非常) 시간은 우리 존재의 속성과 가장 유사하다.

그리스 사람들은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chronos),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찰나의 순간(kairos), 그리고 영원하고 신성한 시간(aion)을 구별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그 셋 중 무엇으로 만들고 싶은가. 소멸하는 내 자아와 의식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이 자기 앞에 주어진, 그리고 자기가 떠나보낸 시간에 대한 명징한 인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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