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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자칭황제 첩 된 조선女, 몸종보다 서열이…

온라인 중앙일보 2012.12.09 01:15
톈진(天津) 시내를 지나다 깜짝 놀랐다. 백화점 건물 사이로 모스크바에서 많이 본 녹색 돔의 러시아 정교 교회당이 보였기 때문이다. 톈진은 서구 열강들이 앞다퉈 조차하면서 지은 건물들이 잘 보존돼 있어 세계 건축물의 박물관 같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33> 톈진의 외세 흔적
자칭 황제, 위안스카이 저택은 식당이 되고…

중국 북방에는 폭력범이 많고 남방에는 사기범이 많다고 한다. 한쪽은 주먹, 다른 한쪽은 머리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방이라고 해서 늘 쿵후 영화를 찍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한국에 비해 멱살잡이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폭력사건의 절반은 술, 나머지 절반은 반말 시비 때문에 일어나고 두 가지가 겹치면 확률은 100%가 된다. 중국인들은 왁자지껄 술을 마시긴 하지만 해롱거리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취중 실수를 체면이 깎이는 일로 생각한다. 평소 반말을 쓰니 이로 인해 싸울 이유는 없다. 이 점이 술 마시다 반말 시비 끝에 ‘말로 해도 될 걸 싸우고 있구나’ 깨닫는 다혈질의 한국인과 다른 점이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들, 관공서로 쓰여

어쨌든 중국에서 주먹과 머리로 남북이 갈리는 현상은 꽤 뿌리깊은 것 같다. 정치권력은 북쪽, 경제력은 남쪽으로 치우친 지 오래 됐기 때문이다. 경제가 발달한 곳에선 돈을 잘 세야 하니까 머리를 많이 쓴다. 역사적으로는 1400여 년 전 수양제(隋煬帝)가 대운하를 판 게 그 증거다. 북쪽은 쌈박질로 날을 지새워 평야가 피폐해지자 남쪽의 풍부한 물산을 가져오려고 하는데 강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 한 줄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서고동저의 지형에 따라 한결같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남북으로 도로를 닦자니 수많은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럴 바에는 강들을 엮어 보자. 마치 바느질하듯 황허(黃河), 양쯔(揚子)강, 화이허(淮河), 첸탕(錢塘)강, 웨이수이(渭水) 등의 수계를 운하라는 실로 꿰맸다. 이렇게 해서 동남쪽에 있는 양쯔강 삼각주에서 생산한 곡식이 서북의 장안(西安)까지 2500여㎞의 물길로 이동했다.



원(元)이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시안까지 갈 필요 없이 곧장 북으로 직선화했다. 곡식들은 스수이(泗水), 하이허(海河) 등을 거쳐 자금성 뒤에 있는 첸하이(前海)까지 실려 왔다. 지금은 유원지가 된 첸하이는 상선 100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부두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여행하는 삼각노선의 마지막 빗변은 바로 이 첸하이부터 항저우(杭州)까지 1500여㎞의 징항(京杭) 대운하 노선이다. 근대 이전 중국 물동량의 75%를 차지한 이 운하의 중요성은 아편전쟁에서 확인된다. 나는 아무리 함포의 성능이 좋다 해도 군함 40여 척, 병력 4000명인 영국군에 4억3000만 명의 청이 항복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 운하의 봉쇄가 결정적이었다. 영국군이 양쯔강의 전장(鎭江) 일대에서 식량의 북송을 차단하자 베이징에 있는 청 도광제(道光帝)의 목을 조르는 효과가 나타났다.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에 있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묘.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고 잡초가 나 있다.
천안문 앞길인 창안(長安)가를 따라가면서 이제는 개천으로 졸아든 대운하의 마지막 구간 텅후이허(通惠河)와 나란히 동진한다. 그리고 퉁저우(通州)에서 웨량허(月亮河)를 만나 남진을 시작하자마자 운하와 헤어져야 했다. 대신 103번 국도를 타고 내려간다. 운하는 내 옆 어딘가에서 흐르고 있겠지.



첫 기착지 톈진(天津)에는 고풍스러운 유럽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외세 침략의 상흔인데 이럴 때 난감하다. 아름답다고 느끼면 침략을 정당화해 주는 것 같다. 그냥 침략의 작은 대가로 톈진의 문화적 다양성에 일조한 것으로 치자. 어쩌면 이게 톈진의 숙명이다. 톈진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한 다수설은 명나라 때 베이징에 있던 주체(朱<68E3>)가 이 나루를 건너 난징(南京)으로 쳐들어가 조카인 건문제(建文帝)의 자리를 빼앗은 후 ‘천자(天子)가 건넌 나루’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정화 함대를 세계에 보낸 명의 영락제(永樂帝)다. 영락제가 수도마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베이징 턱밑에 있는 톈진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니 서구 열강들이 목구멍과 같은 이 도시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1860년 영국·프랑스에 이어 1900년에는 러시아·이탈리아 등 8개국이 베이징의 목을 한 번씩 조르고 나서 톈진에 살림을 차렸다.



조계지에서 만난 신화통신사의 류샤오촨(劉小川) 기자는 “건물들이 사회주의 건국 이후 관공서로 쓰이는 바람에 철거를 피했다”고 말했다. 그중에는 화이허를 바라보고 있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옛 저택도 있다. 위안스카이는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도 평판이 안 좋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민주 헌정의 싹을 짓밟고 황제를 자칭한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그 이후 민주 헌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에서 그의 묘소도 둘러봤는데 비석에 ‘대총통 원세개지묘(大總統 袁世凱之墓)’라고 적혀 있다. 신해혁명 후 그에게 대총통 직을 양보한 쑨원(孫文)의 난징에 있는 묘비명은 ‘총리 손선생(總理 孫先生)’이다. 총리 묘소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지만 한산한 대총통의 묘역 게시판에는 위안씨 후손들의 동정을 전하고 있다. 후손들의 단체 기념사진을 보고 위안씨 종친회인 줄 알았는데 모두 직계후손들이다. 도대체 이게 몇 명이야? 자세히 읽어봤다.



57세에 타계한 그는 처 1명에 첩 9명을 두고 아들·딸 합쳐 32명을 낳았다. 이들이 다시 47명을 낳아서 직계 후손만 79명이다. 가족이 아니라 부족 같다. 쑨원은 총리였지만 국민의 대표, 위안은 국가의 대표였지만 부족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위안스카이는 23세에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조선으로 건너간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그는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20대의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냈다. 그는 권세가의 딸인 안동김씨를 둘째 첩으로 들이는데, 김씨는 정실인 줄 알고 출가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몸종으로 따라온 이씨와 오씨마저 위안스카이가 첩으로 들어앉히면서 첩의 서열에서도 나이 많은 이씨한테 밀렸다. 졸지에 셋째 첩이 된 김씨는 낙담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조선 첩 3명에서 낳은 아들과 딸은 32명 중 15명이다.



그의 묘역은 여러 차례 파헤쳐질 위기에 놓였으나 마오쩌둥이 반면교사로 놔두라고 해서 살아남았다. 톈진 화이허 변의 그의 저택은 식당으로 살아남았다. 보통 대총통의 집이라면 기념관으로 지정하고 보호할 텐데…. 어쨌든 생명력이 길다. 꽃자주색 지붕과 엷은 회색 벽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화려한 3층 양옥이다. 셔우푸쥐로우(首府酒樓)라는 이름의 광동요리 전문식당이다. 황제급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천하통일 아니면 천하대란” 이분법 여전

이 식당 앞에서 베이징에서 놀러 온 젊은 부부를 만났다. 27세인 부인 장젠얀(張劍<598D>)은 영어교사, 29세인 남편 장레이(張雷)는 군인이다. 예쁘고 성격이 급한 부인 젠얀은 오늘날의 중국에 대해 묻자 ‘문제투성이’라고 열을 냈다. 환경오염을 첫째로 꼽으며 “내 고향 산시(山西)성의 타이위안(太原)은 매연이 심해 흰 옷을 입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농민공들이 도시에 올라와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고향에 있는 아이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다”며 안타까워했다. 신랄한 비판은 식품안전과 교육문제 등으로 이어진다. 정부에 대해서도 “영토분쟁에서 미국과 일본, 필리핀 등 주변국들에 대해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믿음직스럽고 느긋한 성격의 남편은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했다. “시간이 필요해. 기다릴 줄 알아야 해.”



그녀가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길래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고 묻자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위안스카이가 짓밟은 민주 헌정을 부활해 선거를 하면 국민의 대표들이 법을 바꿔주지 않겠느냐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인구가 많은데 내 표가 어떻게 이용될지 누가 아느냐”고 말했다. 런타이둬(人太多). 사람이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서로 믿기 어렵고, 너무 많아서 자유를 허용하면 혼란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번 여행에서 만난 대학교수·대학생·농민·상인·노동자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다.



진짜 총선거를 실시하기에는 ‘런타이둬’라면 ‘알맞은 규모로 나라를 쪼개면 어떨까’ 싶다. 이렇게 물어볼 때마다 중국인들은 경기를 일으킨다. 천하통일이 되지 않으면 천하대란이 일어난다는 고래(古來)의 이분법을 여전히 믿고 있다. 이것이 혹시 일당독재가 받아들여지는 심리적 기저가 아닐까? 그럼 위안스카이가 잘못한 게 뭔지 헷갈린다. 그에 대한 수식어는 ‘반동(反動)’이다. 근대에 봉건적 권력을 추구한 사람. 하지만 권력의 성격은 여전히 봉건적이지 않은가?

수양제가 황허와 화이허를 잇는 운하의 핵심적인 구간을 팔 때 불과 5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200만 명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건 런타이둬여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백성들은 늘 자주적 인격체가 아니라 동원의 대상이었고, 그 대가로 전쟁에 불려나가지 않을 정도의 안정을 소망했다.



조계지를 둘러보고 화이허 변으로 와서 다시 장씨 부부를 마주쳤다. 어느새 남편은 부인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 누워 있다. 이마를 간질이는 바람까지 불어서 더욱 사랑스러운 정경이다. 지금의 중국은 비판할 자유가 있고 부부가 평일에 휴가를 내고 데이트할 수 있는 평안까지 온 것에 자족해야 하는 단계일까?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글·사진 =홍은택『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저자 hongdongz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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