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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 4만 개 『영어사전』남긴 ‘제2 셰익스피어’

중앙선데이 2012.12.09 00:26 300호 25면 지면보기
존슨을 처음 본 사람은 그가 정신병원에서 갓 도망쳐온 사람인 줄 알았다. [위키피디아]
말을 잘하려면, 글을 잘 쓰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사전을 외다시피 봐야 한다. 미국 흑인 인권 지도자 맬컴 엑스(1925~65)는 감옥에서 사전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 사전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7> 새뮤얼 존슨

전업 작가 대부분은 한 달에 버는 돈이 50만원에 불과하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있지만, 일단 성공한 작가는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다 받는다. 그런데 책에는 작가 외에도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어려 있다. 작가가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사전·백과사전·지도와 같은 참고서(reference book)의 집필자들이 있다. 작가의 글을 더 뛰어나게 고쳐주는 편집자(editor)들이 있다. 책이 나온 다음에는 글의 가치를 드높여 주는 비평가들이 있다.

‘과부 속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글 쓰는 이의 ‘수호성인’을 글쟁이들 스스로 뽑는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1709~1784)이다. 존슨은 모든 종류의 글을 썼다. 그는 소설가·시인·수필가·비평가·전기 작가, 칼럼니스트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전 편찬자, 편집자였다.

존슨은 천재였다. 3살 때 성공회기도서(聖公會祈禱書, 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외웠다. 옥스퍼드대 재학 시절엔 알렉산더 포프의 시 메시아를 오후에 시작해 그 다음 날 오전까지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진정한 천재는 새로운 인간 활동, 학문 분야의 문을 연다. 적어도 영미 문학계에서 존슨은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과 비판적 편집(critical editing)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작품들이 잘못된 편집 때문에 엉뚱한 모습으로 독자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것도 존슨이 고쳤다. 존슨은 1756년 셰익스피어 희곡에 대한 편집 작업에 착수해 1765년 존슨 편집본 셰익스피어 희곡이 세상에 나왔다.

전기(傳記·biography)라는 장르를 근대화시킨 것도 존슨이다. 시인전(詩人傳·Lives of the English Poets)(1799~81)은 고대 그리스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가 개막한 전기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인간 평등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존슨은 시인전에서 유명 시인뿐만 아니라 무명 시인들까지 다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좌담가(conversationalist)이기도 했다. 에드먼드 버크는 만약 존슨이 정치인이 됐으면 최고의 연설가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는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존슨이 책에 대해 가장 많이 안다”고 평가했다.

글 쓰는 이들의 수호성인
존슨은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초기에는 주로 잡지에 글을 썼다. 여행, 국제관계, 중국 문학, 의학, 소설, 지리학…. 토픽과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성직자들을 위해 설교도 대필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 빚 때문에, 조지 오웰은 바람 피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글을 썼다고 하지만, 존슨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생존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존슨은 “얼간이를 빼놓고는 누구나 오로지 돈을 위해 글을 쓴다”고 주장했다. 서적상이었던 아버지나 어머니나 양쪽 가문 모두 물려받은 유산이 꽤 있었다. 존슨의 대부(代父) 둘 중 한 명은 의사, 한 명은 변호사일 정도로 괜찮은 집안이었다. 그러나 존슨의 집안은 몰락했다. 옥스퍼드대를 중퇴했다. (훗날 옥스퍼드대는 존슨의 영어사전을 학술 업적으로 인정해 석사 학위를 수여했다. 유명해진 존슨은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대학 중퇴자인 그에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가방 끈이 짧다’는 이유로 학교 정식 선생님이 되지 못했다. 아내의 돈으로 학교를 열었으나 학생은 달랑 세 명이었다.

학교 운영에 실패하자 26세인 존슨은 고향 리치필드를 떠나 런던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돈이 되면 뭐든지 썼다. 차츰 필명을 날리게 된 존슨에게 기회가 왔다. 1746년 사전 집필 의뢰를 받게 된다. 당시엔 아직 변변한 영어사전이 없었다. 존슨은 출간까지 3년이면 된다고 큰소리쳤다. 8년 걸렸다. 프랑스학술원이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할 때 40명의 석학들이 55년 동안 매달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6명의 보조원을 제외하곤 단독으로 작업한 존슨의 업적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존슨은 ‘프랑스인 40명이 55년에 한 일을 영국인 1명이 8년에 해치웠다는 것은 그 비율만큼 영국인이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뽐냈다.

영어사전은 표제어 4만2773개, 작가 500명의 작품 2000편으로부터 뽑아낸 인용문 11만3000개로 구성됐다. 인용문은 주로 문학·과학·종교·윤리·교육 분야에서 뽑아냈다. 가장 많이 인용한 작가는 셰익스피어·밀턴·드라이든이었다. 1928년 표제어가 41만4825개인 옥스퍼드영어사전(OED)이 나오기까지 150년 동안 존슨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1775년)은 영어의 표준으로 군림했다.

존슨의 영어사전이 영어 글쓰기에 미친 영향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다. 딱 두 사례를 들자면,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은 데뷔하기 전 작가 수업을 위해 존슨의 영어사전을 통독했다.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1775~1817)에게도 영어사전이 문체와 작품 철학의 원천이었다.

미국 독립선언문·헌법 등 미국 혁명의 주요 문헌에 대해 정확한 의미 분석을 하려면 존슨의 영어사전을 봐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한 손에는 총, 다른 손에는 글쓰기에 필요한 영어사전을 쥐고 있었다. 얄궂게도 ‘민족주의자’였던 존슨은 미국 독립에 반대했다. 미국에 대한 영국의 과세는 정당하며, 미국인들이 참정권을 행사하고 싶으면 영국으로 돌아오면 된다고 주장했다. 분노한 미국인들은 1775년 존슨의 인형을 만들어 화형시켰다. (세월에는 갈등을 봉합하는 힘이 있다. 존슨은 에이브러햄 링컨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존슨이 남긴 서한문의 반이 포함된 그의 원고 컬렉션이 하버드대에 있다.)

존슨의 영어사전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존슨의 영어사전을 ‘몰아낸’ 미국 사전 편찬자 노아 웹스터(1758~1843)는 영어사전의 매 페이지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존슨은 마땅한 용례가 없으면 스스로 인용문을 만들고 저자는 익명(anonymous)이라고 써버렸다.

존슨은 노예제와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존슨은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 영국인·프랑스인은 도둑놈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자식처럼 데리고 있던 프랭크 바버라는 흑인 해방 노예에게 유산의 대부분을 남기기도 했다. 바버는 감리교 목사가 됐다.

“재혼은 희망이 경험을 이긴 결과”
엄청난 다작으로 유명한 존슨이지만 글쓰기를 ‘미루는 버릇(procrastination)’도 있었다. 원고 작업이 항상 밀려있었던 그는 초고를 완성본이라며 출판사에 넘기는 ‘뻔뻔한’ 구석도 있었다. 마감시간이 닥쳐야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단 집필에 착수하면 ‘빛의 속도’를 냈다. 1분에 30단어까지 쓸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비를 마련하고 빚을 청산하기 위해 쓴 우화 소설 라셀라스-아비시니아의 왕자(1759년)는 일주일 만에 썼다.

존슨은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지만 당시 풍조와는 달리 다른 교단 신자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는 모두 같은 예수의 제자’라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진정한 행복은 선행에서 온다’고 주장한 그는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도 그의 집은 식객(食客)으로 우글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다 곤히 자고 있는 거지들을 보면 손에 돈을 쥐여줬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friends in need)에게 돈도 잘 꿔줬다. 존슨은 그 시대의 ‘신용불량자’였다. 몇 푼 안 되는 빚 때문에 여러 번 당국에 끌려갔다. 존슨만큼 고양이를 사랑한 사람도 없다. 애지중지 아끼며 키우는 두 마리 고양이에게는 굴을 먹였다.

존슨은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우울증, 불면증, 천식, 관절염, 투레트 증후군에 시달렸으며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강박장애(OCD)가 있었다. 돈이 좀 생기자 과식하는 버릇이 생겨 건강은 더 악화됐다. 말년에는 정신이 나가지 않을까 두려워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존슨은 영국이 자랑하는 ‘제2의 셰익스피어’다. 존슨은 아포리즘의 대가로도 기억된다. 존슨의 경구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빈번히 인용된다. “애국은 나쁜 놈들의 마지막 피난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술 처먹고) 짐승처럼 된다는 것은 사람답게 되는 데 필요한 고통을 덜어준다” “작가에 대한 최악의 대접은 침묵이다”와 같은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그는 “재혼은 희망이 경험을 이긴 결과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가 3명 있는 과부로 21세 연상이었다. 존슨은 아내가 사별한 남편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다가 망하기도 했다. 존슨은 평생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기 때문에 아내가 가난했고, 글 쓰느라고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1752년 사망했다. 플라토닉한 사랑이 있었던 것 같으나 존슨은 재혼하지 않았다.

말년의 존슨은 사회 명사였다. 신문에 하루도 그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기사거리가 없으면 기자들은 그의 동정에 대해 멋대로 창작을 했다. 그의 마지막 말 중 하나는 “곧 죽게 될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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