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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갈망했으나 당최 모르겠는, 자유

중앙선데이 2012.12.09 00:17 300호 27면 지면보기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詩人의 음악 읽기] 알프레트 브렌델의 ‘11곡의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연주집’

한대수(위 사진)의 자작곡으로, 예전엔 김민기의 목소리로 더 익숙했던 노래 ‘바람과 나’를 흥얼거려 본다. 노래가 태동한 박정희 시절에 ‘아, 자유의 바람’이라고 하면 당연히 정치적 자유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뉴욕에서 갓 돌아와 장발의 히피머리를 휘날리던 20대 청년 한대수에게 1970년대 한국의 공기는 숨막혔으리라. 그런 그가 지금은 60대 중늙은이가 되어 오밀조밀 생활을 이야기하는 라디오 진행자로 살아간다. 보수본당 새누리당 대통령선거 행사에 나가 캠페인송을 부르기도 한다. 시인 김지하의 요즘 모습을 떠올려야 할까.

한대수와 약간의 친분이 있다. 최근에는 잡지사 의뢰로 그와 장시간의 대담과 술자리를 나눈 적도 있다. 그는 여일까 야일까? 좌일까 우일까? 보수일까 진보일까? 그의 노래 대부분을 들었고 그가 쓴 책 전부를 읽었고 그와 긴 시간의 대화를 나눈 바 있는 내가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그는 아무 쪽도 아니다! 아니, 아니고 싶어 한다. 그에게 긴박한 것, 자유의 바람을 막는 현실적 고뇌는 그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화폐’ 즉, 돈의 궁핍함이다.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로, 물결같이 춤추며 자유롭게 불어가는 바람 님은 이름도(무명), 내용도(무실), 느낌도(무감) 없이 텅 비어 있다. 그것이 그의 자유다. 거기에 여야 좌우의 대립상은 허망하고 소소한 일이다. 정작 그의 거대 자유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이마에 돋은 부스럼 같은 사사로운 것, 돈 문제란 말이다.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은 문제일까.

알프레트 브렌델의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연주집’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1950년대 무렵에 씌어진 건반음악 해설서를 보면 ‘오늘날 하이든의 클라비어 소나타는 학습용 이외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 무치오 클레멘티나 스카를라티의 걸작들과 더불어 하이든의 건반음악도 50년대 즈음까지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상쾌함이라니. 우리가 아는 하이든은 귀족 가문의 충직한 하인이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음악적 혁신성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그저 음악 교과서상의 중요 인물로 기억될 뿐이다.

생각해 보니 이렇다. 하이든 이전의 작곡가에게는 신(神)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 있다. 하이든 이후의 작곡가에게는 인간의 정념이 너무 짙게 배어 있다. 물론 하이든의 넬슨 미사류의 종교음악에서, ‘시계’ ‘놀람’ ‘고별’ 같은 교향곡에서 신 또는 인간의 정념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면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건반음악만은 다르다.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도달해 있지 않은 어떤 순정한 상태, 고도로 단순화시킨 무념(無念)의 상태 같은 것이 전달되어 온다. 어쩌면 하이든 스스로 자각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감상자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너무 강한 ‘인간’의 체취가 지겹고 너무나 작위적인 신의 개입이 거북할 때가 있다. 이럴 때 그 피아노 소리의 청명함이라니. 인적 없는 깊은 산속의 샘물!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는 총 52곡에 이른다. 여기에 30곡쯤 되는 건반용 부수음악을 포함시키기도 해 크리스타 랜던의 에디션에 의하면 총 62곡으로 분류된다. 몇 번이 걸작이냐고 한다면 답하기 힘들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처럼 각 곡의 자기 목소리가 두드러진 편이 아닌 탓이다. 그래도 굳이 들자면 처음 그 곡들에 붙들리게 된 음반을 떠올린다. 4장의 CD로 묶여 나온 알프레트 브렌델의 ‘11곡의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연주집’ 그중 제47번 B단조(Hob.ⅩⅥ:32)와 맨 끝 곡인 제62번(Hob.ⅩⅥ:52)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근 30년간에 걸쳐 씌어진 전체 곡을 연쇄물로 이어 듣는 것이 낫다고 본다. 연주자별로 사용하는 악기에 따라 느낌이 크게 다른데 알프레트 브렌델의 냉랭한 연주가 중립적이라면 바두라 스코다는 원전악기를 활용해 작게 축소된 공간감을 보여주고, 그와 대척점으로 루돌프 부흐빈더는 스타인웨이를 동원해 장대한 하이든을 연출한다. 방대한 분량을 레코딩한 데즈 랑키나 존 매케이브의 연주에는 노고를 치하할 일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어떻게 한대수와 하이든의 피아노곡이 연결되는지 설명이 궁색하다. 그저 자유 또는 자유로움이라는 것이 오묘하게 복합적인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통상 부자유의 우선적인 사유인 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위한 정당에 투표하는 일이 내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본능에 따른 쉬운 선택을 한다. 분방함과는 거리가 먼, 훈육주임 같은 브렌델의 빈틈없는 하이든 연주를 들으며 내리는 오늘의 결론. 나 일생토록 자유에 대한 갈망에 목말랐으나 나는 자유를 당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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