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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장면은 슬프게? 뻔하게 만드는 건 질색”

중앙선데이 2012.12.08 22:38 300호 17면 지면보기
“오락성을 미리 조금씩 뿌려놓아야 더 비극적”
원작 ‘리어왕’은 브리튼의 왕 리어가 세 딸의 효심을 평가해 왕국을 물려주려 하나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 코딜리어가 말을 아끼자 분노해 거짓과 아첨을 한 언니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준 후 사악한 본심을 드러낸 딸들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이야기. 고선웅의 ‘리어외전’은 원작 인물들의 개성을 뚜렷하게 살리고 9명의 코러스를 동원해 박진감을 높이는 한편, 파격적인 결말로 비극을 강화했다. 무대 위 무대를 만들고 배우들이 둘러앉아 등·퇴장 과정을 고스란히 노출한 무대 세트도 감각적이다.

연극 ‘리어외전’으로 연말 공연계 도전, 연출가 고선웅


리어외전 연습장면
-작가로서 창작활동도 활발한데 굳이 고전을 재해석한 이유는.
“공연은 시즌이 중요하다. 연말 뮤지컬에 필적하려면 창작 신작으로는 승부할 수 없기에 셰익스피어의 권위를 빌려 내 스타일을 가미하는 길을 택했다. 고전을 비튼 건 리어왕의 드라마 자체가 한국인에게 어울리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대는 선문답을 하고, 등장인물은 다 미쳐가고…. 다 미치니까 우리가 별로 할 게 없다. 셰익스피어는 미친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경구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건데, 그 방식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너무 지루하다. ”

(맨위)칼로막베스(가운데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락희맨쇼,칼로막베스,푸르른날에(아래)리어외전 연습장면
-그럼 왜 리어왕을 택했나.
“이야기는 재미가 없는데 주제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살면서 느끼는 이야기다. 나이 들어 간다는 것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보고 싶고, 그런 얘기를 송년에 하면 의미가 각별할 것 같았다. 결국 주제는 ‘부자유친’과 ‘가화만사성’인데, 연말에 부모·자식이 서로에게 관심도 갖고 서로의 입장을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되새겨 보자는 의미다.”

-보통 서양 고전을 비틀 때 한국적인 틀 안으로 가져오길 시도하는데.
“그런 걸 볼 때마다 잘 무대화됐다는 느낌보다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보여 몰입할 수 없었다. 서양 것을 한국 사회의 시스템에 맞춰 연극으로 만들려면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키는 게 관건이다. 아예 한국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관객들은 억지로 짜맞춰지는 스토리에 강요당할 확률이 높다. 좋은 주제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의미가 있지, 한국화시키는 것은 주제 전달에 별 의미가 없다.”

고선웅:1968년생. 중앙대 신방과를 졸업하고 4년 동안 광고회사를 다니다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희곡 ‘우울한 풍경 속의 여자)이후 활발한 극작 활동을 하며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2002), ‘지킬 앤 하이드’(2004) 등의 각색으로 이름을 알렸다. 2005년 극공작소 마방진을 차리고 연극 ‘강철왕’ ‘락희맨쇼’ ‘인어도시’ 등을 연출했다. 지난 8월에는 일본 현대 연극사의 신화적 존재인 재일동포 고(故) 쓰카 고헤이의 대표작 ‘뜨거운 바다’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출해 호평을 얻었다.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을 겸하고 있다.
“쉽지만 예술성 있게... 본질로 돌아가 돌파구 찾겠다”
고선웅은 자신의 연극을 비극 속에 장난기와 재미의 요소를 가득 담은 ‘오락비극’이라고 정의한다. 리얼리즘을 거부하고 관객과 거리를 둔 채 한바탕 퍼포먼스를 펼치는 활기찬 연극놀이는 고선웅표 서사극으로 양식화됐다. 무대 위에 사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골프채가 지팡이도 되고 칼자루도 된다. 리얼한 감정연기는 금물이다. 극은 예견되는 전개에 끊임없이 딴지를 걸며 의외의 장면을 이어가나 엉뚱함 속에 오히려 진정성이 드러나고, 웃음과 애환이 첩첩이 쌓여 하나의 비극으로 수렴돼 간다.

-오락비극이라니, 비극이 어떻게 유쾌할 수 있나.
“미리 뿌려놓은 오락성에 의해 결말이 더 슬퍼진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아름다운 인생’에서도 아버지가 가진 유머와 익살스러움이 없었다면 걸어가다가 총소리가 ‘빵’ 하는 순간 비극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우리 연극도 그런 장난을 적분시켜 놓기 때문에 나중에 급전직하는 힘들이 생긴다. 비극이라고 원작의 정서에 그대로 빠져서 가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반대로 장난을 쳐 조금씩 비켜가더라도 결국 비극의 본질적 운명은 피해갈 수 없는 수순을 밟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울 수 있다.”

-연극놀이 같은 ‘고선웅 스타일’은 어떻게 구축된 건가.
“빤한 걸 못 견딘다. 슬픈 장면을 리얼리즘으로 표현하면 가짜 같다. 연극은 매일 반복해야 되는데 어떻게 매번 똑같이 울 수 있나. 내가 보고 싶은 건 그 사람의 진정성이기에 차라리 연극이라 들키고 가는 게 낫다. 판소리나 가부키도 연기에 감정선이 없는 이유가 있다. 곡소리를 낼 때 감정이입해 울어버리면 우리가 할 게 없다. 분노를 해도 양식화해 보여주는 서사극적 요소가 있어야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놀이와 유희성에 천착하는 이유다.”

-재미와 오락이 연극의 본질이라면 비극에서 웃음을 추구하기보다 그냥 희극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연극에는 고매한 정신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몇 달을 고민하며 만들 필요가 없다. 재미와 오락이란 과정은 필요하지만 볼 만한 가치가 전제돼야 한다. 연극을 할 때는 배우와 모든 스태프가 몇 달간 연습을 하면서 그 이야기 자체로부터 삶을 성찰하고 인생에 새로운 좌표를 얻기도 한다. 그런 작품에서 관객도 좋은 영향을 받는다. 주제의식이 없고 단지 돈만 벌기 위한 작품을 1년간 작업하고 나면 눈빛이 다 달라져 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니까. 돈만 찾는 곳에서 인간의 향기는 없다. 그래서 연극엔 사랑이 필요하다.”

-뮤지컬보다 재미있는 연극을 내세웠는데, 무엇으로 승부하나.
“연극은 태생적으로 뮤지컬의 스펙터클과 경쟁할 만한 구조는 아니다. 굉장히 미니멀하다. ‘이 이야기, 재밌을 것 같지 않아?’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관객을 놀라운 상상력에 빠지게 하는 게 연극이다. 거대자본은 다 보여줘 버리지만 연극은 뇌를 자극해 상상력을 키워주는 작업이다. 시작부터 그랬다. 멧돼지 사냥을 해 온 남자들이 축제를 벌여 여자들에게 멧돼지 잡는 과정을 상상하도록 한 거다. ‘그랬다 치고’에서 생기는 재미가 바로 연극의 재미다. 그런 상상력을 잘 배치한 미장센 속에서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면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

-노래와 춤이 가미되고 코러스들이 등장하는 건 뮤지컬과 경쟁하기 위해선가.
“연극 자체에 그런 음악적 요소가 다 있다. 장르화돼 뛰쳐나갔을 뿐 뮤지컬도 엄밀히 연극 속에 있다. 어차피 인생도 연극이다. 셰익스피어도 세상은 무대고 인간은 배우라고 하지 않았나. 내 작품 스타일도 그런 생각에 기반한 거다. 우리는 끊임없이 연기하며 산다. 그런 역할극 인생을 들여다 보는 것이니 연극이 얼마나 재미있나.”

-대중성과 예술성을 두루 인정받기 쉽지 않을 텐데.
“대중성이란 관객 측면이고 예술성은 대본과 연기, 즉 제작 측면인데 연극이 관객 없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나. 대중이 외면한다면 잘못된 거다. 누가 봐도 쉬워야 한다. 예술성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가치를 쉽게 잘 보여주는 게 관건이다. 예매율 1위부터 10위까지 다 코미디가 차지해 순수 연극은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나는 연극의 패러다임을 바꿔보고 싶다. 연극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이런 게 연극이야’라는 고정관념에 묶인 형태를 대중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희와 오락의 본질로 돌아간 가장 연극적인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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