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진홍의 소프트 파워] 말짱 도루묵

중앙일보 2012.12.08 00:18 종합 38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강릉 사는 지인이 도루묵을 택배로 보내왔다. 갓 잡아 싱싱한 데다 알이 가득 밴 것들이었다. 본래 도루묵은 해저 깊은 곳의 모래나 펄에 서식한다. 하지만 초겨울이 되면 알을 낳기 위해 해조류가 많고 물이 얕은 해안으로 몰려든다. 그래서 요즘 강릉과 주문진 등 동해안에서는 물만 잘 만나면 알밴 도루묵이 해안에 지천이다. 실제로 동해안 일대의 어항마다 방파제에는 강태공들이 몰려들어 미끼조차 물리지 않은 낚시를 드리우는 족족 도루묵을 낚고, 어떤 이들은 아예 뜰채로 건져 올릴 정도란다.



 # 본래 도루묵은 트럭째 싣고 다니면서 삽으로 퍼서 팔 만큼 강릉 쪽 동해안에서는 아주 흔한 생선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급감해 급기야 2006년에는 자원보호 대상 어족으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그 후 강릉수협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도루묵 치어를 방류하고 산란장 근처에서의 조업을 금지시키는 등 도루묵 보호작전을 대대적으로 편 덕분인지 이제는 도루묵이 퍼서 담을 지경이 되자 되려 산지가격이 급락해 어부들과 현지 판매상들이 울상을 짓게 됐다. 어쩌면 자기 이름처럼 많이 잡아도 말짱 도루묵이 될 판인 게 도루묵의 타고난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 조선 중기 인조 때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고 당대에 한문 4대가로 일컬어지던 택당 이식(李植·1584~1647)이 남긴 택당집(澤堂集)에 도루묵을 읊은 ‘환목어(還目魚)’라는 시가 전하는데 인용하면 이렇다. “목어라 부르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해산물 가운데서 품질이 낮은 거라/ 번지르르 기름진 고기도 아닌 데다/ 그 모양새도 볼 만한 게 없었다네/ 그래도 씹어보면 그 맛이 담백하여/ 겨울철 술안주론 그런대로 괜찮았지// 전에 임금이 난리 피해 오시어/ 이 해변에서 고초를 겪으실 때/ 목어가 마침 수라상에 올라와/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해드렸지/ 그러자 ‘은어’라 이름을 하사하고/ 길이 특산물로 바치게 하셨다네// 난리 끝나 임금이 서울로 돌아온 뒤/ 수라상에 진수성찬 서로들 뽐낼 적에/ 불쌍한 이 고기도 그 사이에 끼었는데/ 맛보시는 은총을 한 번도 못 받았네/ 이름이 삭탈되어 ‘도로 목’어로 떨어져서/ 순식간에 버린 물건 푸대접을 당했다네//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지/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이 아니라네/ 넓고 넓은 저 푸른 바다 깊은 곳에/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이상현 역, 『국역 택당집』)



 # 왕이 피란하였는데 드실 것이 마땅치 않자 아랫사람들이 그나마 비린내가 덜 나는 잡어를 구해 요리해서 올렸다. 피란하던 왕이 이를 아주 맛있게 먹고 난 후 생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유난히 튀어나온 물고기의 눈 때문인지 ‘목(目)’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은 이렇게 맛있는 생선에 ‘목’자는 가당치 않다며 생선의 배에서 은색이 도니 ‘은(銀)’이라 부르게 했다. 졸지에 ‘목어’로 불리던 도루묵은 ‘은어’가 됐다. 왕이 피란을 끝내고 환궁한 후 다시 수라상에 ‘은어’가 올랐지만 왕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먹을 것이 궁했던 피란처에서와는 달리 산해진미가 넘쳐났기 때문이리라. 결국 왕은 수라상을 물리면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도로 ‘목’이라 하라”! 이렇게 해서 목어는 은어가 되었다가 다시 ‘도로 목’ 즉 환목어가 된 것이다. 여기서 생겨난 말이 ‘말짱 도루묵’이다.



 # 세상만사 ‘말짱 도루묵’인 경우가 허다하다. 밤새도록 시험 준비를 했는데 새벽녘에 깜박 잠들어 결국 시험 시간에 늦어 준비한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나, 애인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한껏 멋을 내 치장하고 나갔다가 바람맞아 말짱 도루묵이 된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요즘 세태에서 안철수만큼 ‘말짱 도루묵’이 된 이가 또 있을까 싶다.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니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대 모습 아니겠나” 하는 택당의 시 구절로나마 위안 삼기를 권할 따름이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