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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칼럼] 대선을 모독하는 대선 후보

중앙일보 2012.12.07 00:18 종합 35면 지면보기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미국 소비자운동의 창시자인 랠프 네이더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네 번 대선에 출마했다. 민주·공화 후보의 양강구도로 치러지는 대선에서 그는 항상 ‘기타 후보’였다. 그는 후보들의 TV토론에도 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더는 타임지에 의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프린스턴대학과 하버드대학 법학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 강사와 변호사로 명성을 얻은 그가 왜 당선 가능성 제로인 대선에 출마한 것인가?



 랠프 네이더에게는 실현할 비전이 있고, 구체적인 어젠다가 있었다. 그는 대기업이 사실상 미국을 지배한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는 30대 초에 미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의 결함을 실증적으로 폭로하는 신문기고와 책을 써서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네이더는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100개 이상의 공익단체를 만들어 소비자들이 쓰는 공산품과 환경과 근로자들의 작업환경을 감시했다. 랠프 네이더가 대선에 출마한 것도 양당 후보들의 관심 밖에 방치된 생활 어젠다를 공론화하고 실제로 대통령이 될 양당 후보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



 네이더의 노력으로 근로자의 직업 안전과 건강을 다루는 정부 기구(OSHA)와 환경청(EPA), 소비자상품안전위원회가 신설되고 안전한 식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네이더의 제안과 압력으로 제정된 소비자 권익 보호에 관한 법률은 수십 개다. 미국 사람들은 랠프 네이더 덕에 보다 안전한 차를 몰고, 보다 건강한 식품을 먹고, 보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보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보다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을 한다고 고마워한다. 네이더는 “네가 네 권리를 지키지 않으면 그 권리를 잃게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마이너 정당 후보의 존재 이유는 이런 것이다. 한국의 주요 정당들은 지금까지 구조적으로 서민층보다는 기득권층의 권리와 이익 보호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쌓인 부작용이 양극화로 나타났다. 양극화가 폭발 직전의 변곡점(Inflection point)까지 왔다는 위기감과 거기에 대한 반성으로 이번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경제민주화 정책을 쏟아낸다. 그러나 박근혜와 문재인의 사회·경제 정책은 엉성한 사각지대가 많다. ‘기타 후보’가 할 일은 거대정당 후보들의 공약에 확대경을 들이대고 모자라는 부분을 추궁하여 보완·확대하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 후보 이정희의 대선 출마의 목적은 불순하기 짝이 없다. 당선은 처음부터 넘볼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서민생활, 일자리 잃은 쌍용자동차 근로자들, 850만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문제에 집중하여 박·문 두 후보의 관심을 끌고 그들로부터 확실한 해결의 약속을 받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이너 후보라고 그가 추구하는 이슈까지 마이너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정희는 TV토론에서 자신은 박근혜를 떨어뜨리기 위해 대선에 출마했다고 선언했다. 그건 국민과 대선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정치생활에서 그에게 무거운 족쇄가 될 것이다. 한국 정부를 ‘남쪽 정부’라고 부르고 천안함 사건에서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거야 새삼 놀랄 것도 분노할 것도 없다. 그게 그들의 시종일관된 입장이다.



 문제는 이정희와 그 추종자들이 동굴 속 사람들처럼 좁고 객관적인 현실에 무지한 시야와 상식 이하의 매너로 정치를 왜곡하고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한풀이와 증오의 정치는 시대착오적인데도 그렇다.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검증할 귀중한 토론시간에 언어폭력에 가까운 독설로 이정희는 0.2%의 지지자들의 갈채를 받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걸 모르는가, 악명이라도 떨치고 싶은가. 박근혜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출마했다는 이정희의 강변은 이번 대선의 역설이다. 지지율 0.2%인 그의 출마로 박근혜가 피해를 볼까? 피해 볼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박근혜가 아니라 문재인일 것이다. 이정희는 말로는 박근혜를 낙선시키겠다면서 행동으로는 박근혜를 돕고 있다.



 후보 토론 이대로는 의미가 없다. 질문 1분, 답변 1분30초로는 의미 있는 토론이 될 수 없다. 선거법상 선관위가 주관하는 토론에서 이정희를 뺄 수 없다면 박·문 합의로 관훈클럽이나 방송기자클럽 초청 양자토론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차선은 선관위 주관 토론이라도 질문 항목을 줄여 각 후보의 매번의 발언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주제를 벗어난 인식공격성 발언은 사회자가 단호하게 제지해야 한다. 1차 같은 토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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