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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경업 장군, 마산 지나다가 백마에 우물 물 먹여

중앙일보 2012.12.06 04:10 2면 지면보기
송파구 마천동 마천성당의 1970년대 모습이다. 미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천막성당 앞에 모여 있다.



[우리 동네 유래] 송파구 마천동

마천동은 서울 동쪽의 송파구, 그 중에서도 동쪽 끝자락인 남한산성 초입에 위치해 있다. ‘마천(馬川)’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지역에 있는 마산(馬山)의 이름을 따서 마천리라 했다는 게 첫 번째 설이다. 마산은 말이 앉아있는 듯 한 모습 때문에 붙여졌으며 천마산(天馬山)으로도 불렸다. 또 다른 하나는 조선조 중기 임경업 장군과 얽혀있다. 임경업 장군이 백마를 얻어 타고 마산을 지나다가 백마우물이란 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는데, 이 샘은 가뭄이 와도 물이 계속 나온다고 해 마천동이 됐다. 일부에서는 청나라 군사들의 진이 ‘말의 내(馬川)’를 이룰 만큼 컸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지역 토박이들은 임경업 장군의 백마가 개울물을 마신 곳이라는 유래에 힘을 싣고 있다. 마천동과 관련해 송파에 전해 내려오는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임경업 장군(1594~1646)은 조선 중기 때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인물이다. 그는 송파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공식적으로는 충주 출생으로 기록돼 있다. 어릴 적에 전쟁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친구를 죽여 충주로 도망가 자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경업이 성인이 돼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일이다. 그가 남한산을 지나고 있었는데 길 옆 연못에서 나온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부터 칼을 한 자루 얻어 찼다. 어느 산기슭을 지날 때는 산 위에서 천둥을 치는 듯 요란한 말 울음 소리가 나더니 백마 한 필이 그의 앞에 와서 섰다. 이곳이 마천동의 마산이었다. 임경업이 말에 올라타자 말은 곧 날아갈 듯이 한양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리던 말이 마산을 지나 어느 작은 우물 앞에 멈춰서 물을 마셨다. 그 후 이 샘물을 백마우물이라 불렀다.



 말을 탄 임경업이 고향마을에 다다랐을 때, 백마가 어느 야산 앞에 멈췄다. 그곳에 장롱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안에 갑옷이 있었다. 그는 갑옷을 꺼내 입었고, 그 옆에 삐죽하게 생긴 산이 있어 올라가 보니 투구가 있어서 그것을 머리에 썼다. 갑옷을 꺼내 입은 곳은 개롱리, 투구를 머리에 쓴 곳은 투구봉이다.



 이렇게 백마와 갑옷·투구를 마련한 임경업은 한양으로 가서 무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10년(1618)의 일이었다. 송파구 문정동 두댐이 마을에 조부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 한 채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생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부터 마천동은 넉넉하게 사는 집도 없었지만,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인심이 후하고 단합이 잘 됐다고 한다. 두레나 품앗이는 물론, 한국전쟁 후 농학도 하고 한해 농산물을 모아 농산물 품평회도 열었다. 일제 때 마을을 떠난 이들이 해방 후 다시 돌아갔을 때도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줬다.



 거여동과 마천동 경계에 있던 너른 벌판을 ‘만호벌’이라고 불렀다. 한 예언자가 ‘1만 가구가 살 수 있는 큰 도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송파구가 진행 중인 거마 뉴타운 계획을 보면 마천역·거마로 교차지점 등을 상업·업무중심지역으로, 성내천변과 천마산 근린공원 주변은 주거 중심 지역으로 개발한다는 내용이 있다. 마천동 뉴타운 사업이 잘 진행된다면 예언자의 말대로 마천동이 ‘만호벌’로 불릴 날이 곧 올 것이다. 산과 경치는 물론, 공기까지 좋은 이 마을이 옛 것을 이어 가며 좀 더 발전해 나가길 소망해본다.



김혜경(45)씨는 2010년 송파문화원 박물관대학 수료 후, 심화과정을 거쳐 송파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부박물관대학 수료 후 멘토교사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전시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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