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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의사 외길 … “아버지 존경하고 자식 존중하는 가풍”

중앙일보 2012.12.06 04:10 1면 지면보기
지난 1일 역삼동 성상철 교수 자택에 가족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성상철 교수, 부인 신미애씨, 손녀 우빈양, 며느리 박지연씨, 손녀 채빈양, 아들 성용원 교수.



서울대병원 성상철 교수 댁

요즘 아버지와 똑같은 직업의 길로 접어드는 이가 얼마나 될까. 새로운 것에 눈돌리기 쉬운 10대에겐 쉽지 않을 결정이다. 그 일의 좋은 점뿐 아니라 고되고 나쁜 점까지 아버지를 통해 봤을 테니 말이다. 3대째 의사 한 길을 이어가고 있는 집안이 있다. 아버지의 직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람과 가치를 배운다. 자녀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는 자녀를 존중하는 교육 가풍이 자연스럽게 의사 일가를 이룬 비결이다.



글=조한대 기자 , 사진=김진원 기자



#1 1941년, 경남 거창에서 ‘수재’ 소리를 듣던 청년은 경성제국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6년이 지난 47년, 청년은 교수가 되고 싶어 학교에 남기로 했다. 정형외과 무급 조수로 공부를 시작했다. 참한 아가씨와 결혼도 했다. 그 해 가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고향에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가장이 돼버린 청년은 집안을 꾸려나가기 위해 고향 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간 곳에서 ‘자생(慈生)의원’을 열었다. 고향 사람들의 생활은 어려웠다. 치료비가 없는 환자가 부지기수였다. 병원에 온 환자를 그냥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치료비를 받지 않거나 일부만 받았다. “추수하거든 갚아.” “다음에 돈 벌어서 갚아.” 돈을 못 내 미안해 하는 환자에게 그가 전한 말이었다. 지난 2004년 의원 문을 닫을 때까지 57년간 그는 한결같이 환자 곁을 지켰다. 2008년 작고한 1대 고 성수현 박사의 인생이다.



#2 거창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유학을 가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경남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줄곧 1, 2위를 다퉜다. 67년, 아버지 뒤를 따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와 함께 교정을 걸었다. 아버지는 “병을 고치는 의사보단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라”고 말했다. “네가 정형외과 교수가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의 목표는 그 때 정해졌다. 전공의 3년차 때 제주도립병원으로 파견을 가게 됐다. 당시 제주도 의료시설 수준은 서울과 비교해 형편 없었다. 이 지역 전체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는 그가 유일했다. 많은 수술을 해야 했다. 은사와 함께 제주도에서 처음 시행한 인공관절수술도 했다. 시설이 낙후돼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보람 있었다. 주민들에게 ‘명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 시절 추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81년 서울의대 정형외과 전임강사 발령을 시작으로 서울의대 학장보, 분당서울대병원장, 서울대병원장을 했으며 대한병원협회장을 거쳐 현재 대한정형외과학회 차기 회장으로 선임됐다. 아버지가 바랐던, 그가 삼았던 목표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77년 가족들과 강남구로 이사 와 35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2대 성상철(64) 서울대학교병원 교수의 삶이다.



#3 그는 어려서부터 프라모델, 라디오 조립을 좋아했다. 만들고 고치는 일이 재미 있었고 손재주도 있었다. 이런 그는 의사인 할아버지·아버지 영향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이미 외과 의사를 장래희망으로 정했다. 리라초등학교를 나와, 삼성동 언주중학교, 서초동 양재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94년 고려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인턴 생활을 할 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주변에선 아버지를 따라 정형외과를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달랐다. 모두가 가지 않으려는 ‘흉부외과’를 선택했다. 교육·시설·의료진 수준을 고려해 서울대병원 흉부외과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는 곳이었다.



흉부외과 생활은 힘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일상 생활처럼 겪었다. 그러나 이런 삶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죽어가던 환자가 자신의 노력으로 회복됐을 때 느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대 성용원(37) 서울대보라매병원 교수의 얘기다.



한 집안에 3대가 모두 의사다. 이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 답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성상철 교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훌륭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았다. 아버지와 함께 읍내를 걸어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밝은 표정으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 명절에 주변 이웃이나 친척을 찾아가면 아버지 칭찬을 매번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왕진 가는 모습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성상철 교수는 “아버지는 집안 사정으로 급히 고향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전문 과목이 없으셨다. 의료 시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독학으로 직접 마취, 수술까지 도맡아 하시며 환자를 살리셨다. 동네에서 내 또래 신생아들은 거의 다 받으셨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아버지와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덧붙였다.



성용원 교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항상 가족을 최우선으로 삼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에겐 잔소리 한 번 듣지 않았다. 혼난 적도 몇 번 없다. 바쁜 의사 생활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지만 그의 마음엔 ‘존경심’이 싹트고 있었다. 성용원 교수는 “가끔 아버지를 뵈러 병원에 찾아갔다. 흰색 가운을 입고 계신 모습을 보면 정말 멋있어 보였다”며 “생명을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걸을 수 있는 건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어머니 교육을 ‘맹모삼천지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제게 관심이 많으셨다. 항상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제 고등학생 시절엔 집 TV를 없애셨다”고 말했다.



이 집안에도 몇 해 전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 성용원 교수의 두 자녀다. 그는 “일곱 살, 네 살 딸 아이를 뒀다. 첫째가 ‘아빠가 너무 늦게 들어와 의사는 하지 않고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서도 “녀석들이 의사를 희망한다면 나에게 또 다른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다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내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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