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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19) 우한

중앙일보 2012.12.06 00:44 경제 10면 지면보기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조선시대 한강(漢江) 북쪽에 한양(漢陽)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한수(漢水) 남쪽에 한양(漢陽)이 있었다. 한양 옆 창장(長江) 건너에는 101년 전 중국의 황제 지배체제를 무너뜨린 도시 우창(武昌)이 있었다. 한수 건너 한커우(漢口)와 함께 세 개의 도시가 1949년 합쳐져 후베이(湖北)성의 성도 우한(武漢)이 됐다. 중국의 중앙에 위치한 ‘동방의 시카고’로 불리던 우한으로 떠나보자.


청조 무너뜨린 우창봉기의 도시 … 우 임금 치수의 전설 깃들어

# 우한의 상징 황학루



우한은 호수의 도시다. 총 면적의 4분의 1이 물이다. 물의 고향이다. 우창·한커우·한양 3개 도시가 ‘삼족정립(三足鼎立)’의 형세를 이룬다. 우한은 물고기와 쌀이 풍부해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리는 후베이성의 중심지다.



조선시대 한강(漢江) 북쪽에 한양(漢陽)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한수(漢水) 남쪽에 한양(漢陽)이 있었다. 한양 옆 창장(長江) 건너에는 101년 전 중국의 황제 지배체제를 무너뜨린 도시 우창(武昌)이 있었다. 한수 건너 한커우(漢口)와 함께 세 개의 도시가 1949년 합쳐져 후베이(湖北)성의 성도 우한(武漢)이 됐다. 중국의 중앙에 위치한 ‘동방의 시카고’로 불리던 우한으로 떠나보자.



우한(武漢)의 상징 황학루와 창장대교의 모습이다. 창장 건너 구산(龜山)의 송신탑이 보인다. 구산에는 우(禹)임금의 치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明)대에 세운 청천각(晴川閣 )이 있다. [중앙포토]


 모든 도시에는 랜드마크가 있다. 우한의 경우 황학루(黃鶴樓)다. 악양루(岳陽樓),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 3대 누각으로 불린다. 사산(蛇山) 위에서 창장을 굽어보고 있다. 황학루는 높이 55.47m로 중국의 누각 가운데 가장 높다. 삼국지의 손권(孫權)이 223년 유비(劉備)와 전쟁을 대비해 세웠다. 손권은 군사 요충지인 이곳에 군사도시 진(鎭)을 세우며 ‘무로 나라를 다스려 번창케 하겠다(以武治國而昌)’고 말했다. 우창(武昌)의 유래다. 황학루 편액에는 ‘초천극목(楚天極目)’이 새겨져 있다. ‘초나라 하늘을 끝까지 본다’는 뜻이다. 우한은 춘추전국시대 남방의 강국 초(楚)나라의 땅이었다.



 황학루에는 신선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한 술집에 공짜 술을 즐기는 도사가 있었다. 주인은 싫은 내색 없이 그를 환대했다. 어느 날 도사는 먼 길을 떠나야 한다며 밀린 술값을 대신해 황학 한 마리를 벽에 그려줬다. “손님이 올 때 손뼉을 치면 황학이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란 말을 남겼다. 주인이 손뼉을 치자 황학이 튀어나왔다. 입소문을 탄 술집은 크게 번성했다. 십 년 뒤 도사가 홀연히 돌아와 피리를 불어 황학을 타고 돌아갔다. 도사 덕에 큰돈을 번 주인은 이를 기념해 술집 자리에 누각을 세웠다. 황학루의 유래다.



 이후 수많은 시인들이 황학루를 노래했다. 그중 최호(崔顥)의 시를 최고로 친다. “옛사람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이곳엔 황학루만 남았구나(昔人已乘黃鶴去,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한 번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흰구름만 천 년을 멀리 떠가네(黃鶴一去不複返,白雲千載空悠悠)/ 맑은 날 강에서 빛나는 한양의 나무, 앵무 섬에는 방초 가득하구나(晴川曆曆漢陽樹,芳草??鸚鵡洲)/ 날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안개 피어나는 강 위에 수심 잠기네(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上使人愁).”



 시선(詩仙) 이백(李白) 역시 우한을 지나며 황학루에 올랐다. 그는 우한의 별명인 ‘강성(江城)’이 유래한 시를 남겼다.



 “두 사람이 똑같이 장사로 유배 떠나는 신세(一爲遷客去長沙)/ 서쪽으로 장안을 바라봐도 집이 보이질 않네(西望長安不見家)/ 황학루 위에서 부는 옥피리 소리에(黃鶴樓中吹玉笛)/ 강 마을은 오월에 매화 꽃잎을 떨어뜨린다(江城五月落梅花).”



 5월의 매화 꽃 흩날리는 강의 도시 우한의 주당(酒黨)들도 이백의 열렬한 팬이다.



 “남쪽 호수, 가을 물, 밤하늘 안개(南湖秋水夜天煙)/ 물결 타고 곧바로 하늘로 치솟아 올라(耐可乘流直上天)/ 동정호로 가서 달빛을 사다가(且就洞庭





月色)/ 배 타고 하얀 구름 가에서 술을 산다(將船買酒白雲邊).”



 우한의 주당들은 백주 ‘바이윈볜(白雲邊, 하얀 구름 가장자리)’을 마신다. 바이윈볜이 이백의 이 시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지음(知音)의 땅, 황제 지배를 무너뜨리다



지난 6월 23일 시인 굴원(屈原·BC 340~BC 278)을 추모하는 단오문화제가 우한 동호에 있는 굴원기념관에서 열렸다. 단오절은 ‘이소(離騷)’의 작가 굴원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됐다. [중앙포토]
유백아(兪伯牙)는 전국시대 후기 초나라의 유명한 음악가였다. 자연의 소리를 거문고로 노래하는 데 능했다. 어느 날 유백아가 거문고 현의 이상한 떨림에 주위에 누군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마침 나무꾼 종자기가 앉아 백아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백아는 즉흥으로 ‘고산(高山)’을 연주했다. 종자기는 “아아(峨峨)하기가 태산과 같다”고 찬탄했다. 이어 ‘유수(流水)’를 연주하자 “양양(洋洋)하기가 황허·창장과 같다”며 감탄했다. 흥분한 유백아는 “당신만이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구려”라며 종자기를 ‘지음(知音)’이라 불렀다. 어느 날 종자기가 세상을 떴다. 백아는 그의 묘 앞에서 비통한 마음을 담아 연주했다. 연주를 마친 백아는 거문고를 부순 뒤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종자기의 묘소가 우한에 있다. 구산(龜山) 서쪽 고금대(古琴台)가 바로 그곳이다.



 우(禹) 임금이 창장의 홍수를 다스렸다는 전설의 무대가 우한이다. 삼국지의 전쟁터이기도 했다. 한족(漢族)의 영웅 악비(岳飛)가 금(金)나라 여진족에 항전했던 주둔지가 지금의 우한인 악주(鄂州)였다. 세월이 흘러 청(淸) 말 호광(湖廣) 총독 장지동(張之洞)은 우한을 근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의 제철소 격인 호북철정국(湖北鐵政局)을 설치했다. 베이징에서 광저우를 잇는 징광(京廣)선 철길의 레일 대부분을 여기서 공급했다. 그는 호북신군(湖北新軍)을 육성했다. 중체서용론자 장지동은 지금도 우한의 아버지로 칭송받는다.



 1911년 10월 10일 2000여 년을 이어온 황제 지배체제를 무너뜨린 호북신군의 총성이 우한에서 울려 퍼졌다. 바로 황제의 나라(帝國)가 무너지고 백성의 나라(民國)가 시작된 우창봉기다. 민국의 시작은 군벌의 발호로 순탄치 못했다. 쑨원(孫文)의 국민당은 신생 공산당과 손잡고 1927년 우한에 국민정부를 세웠다. 우한이 전중국의 수도가 됐다.



# 우한의 기상, 마오쩌둥을 사로잡다



“만리 창장을 가로질러 건너, 눈을 들어 넓은 초나라 하늘을 바라본다(萬裡長江橫渡,極目楚天舒).… 돛단배가 바람에 창장을 질주하고, 구산과 사산이 마주 보니, 원대한 구상이 떠오른다(風檣動, 龜蛇靜, 起宏圖). 창장대교가 남북을 가로지르니, 천연의 요새가 탄탄대로로 변했도다(一橋飛架南北, 天塹變通途).”



 1956년 6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창장을 수영으로 건너며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調歌頭)’를 본떠 지은 ‘수조가두 유영(游泳)‘이란 시의 일부다. 우한의 풍광을 시적으로 읊었다. 1957년 개통 예정인 창장 첫 다리인 창장대교를 상상하는 마오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오에게 우한은 자랑이었다. 우한창장대교가 놓일 무렵 세운 우한강철은 영국과 미국을 10년 안에 따라잡겠다는 대약진 운동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바오산·안산·서우두 강철에 밀려 중국 4위의 제철회사지만 우한강철은 중국 최초의 종합제철소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대약진의 실패로 곤경에 처한 마오가 머물며 문화대혁명을 구상한 곳도 우한이었다.



# 구두조(九頭鳥) 호북인(湖北人)



시진핑(習近平)을 비롯한 5세대 지도부 중 다수는 젊은 시절 마오의 구호에 따라 ‘지식청년(知靑)’ 활동을 펼쳤다. 한커우 출신의 작가 뤄스한(羅時漢·62)은 지청 시절 중국 8대 도시 출신 젊은이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베이징은 자애로운 어머니, 상하이는 화려한 도련님, 톈진은 잘생긴 기사(騎士), 우한은 다정한 악사, 광저우는 참한 아가씨, 난징은 용맹한 장정, 시안은 정정한 노인, 충칭은 겸손한 뱃사공.” ‘이소(離騷)’의 시인 굴원(屈原)의 후예답게 우한은 ‘다정한 악사’들이다.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湖南) 사람들이 달관적이고 실무적인 데 반해 후베이 사람은 정감을 중요시하며 시원스럽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보통 중국 사람과 다르다.



 고전해설가로 이름 높은 이중톈(易中天)은 『독성기(讀城記)』에서 “하늘에는 머리 아홉 달린 새(九頭鳥), 땅에는 후베이 늙은이”라고 우한을 설명했다. 후베이 사람은 성격이 불 같고, 욕 잘하기로 유명하다. 중국 사람들은 얌체족인 상하이 사람들을 얄미워하지만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 같은 우한 사람들을 무서워한다. 단 미워하지는 않는다.



 우한은 진(鎭)이다. 진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전략가들이 쟁취하려고 다투던 천혜의 요새다. 우한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며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을 칠 수 있는 요충지다. 사통팔달보다 한 수 높은 ‘아홉 성을 연결하는 네거리’라는 뜻의 ‘구성통구(九省通衢)’로 불린다. 자연스레 우한 사람들은 전투의식과 경계의식이 강하다.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몸을 부딪치거나 물건을 사다가 조그만 문제만 생겨도 싸울 준비를 한다.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보답한다”는 신조가 투철하다.



 우한 사람들은 정의롭고 대범하다. 우한에는 ‘겅펑유(梗朋友)’란 말이 있다. 베이징 사람들이 의형제를 뜻하는 ‘톄거먼(鐵哥們)’과 같은 뜻이다. 겅(梗·경)은 ‘굳세다, 곧다, 정직하다’는 뜻이다. 겅펑유가 되면 우한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도와준다. 머리가 아홉 개인 듯 괴팍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악사와 같고, 전투적이면서도 의리가 투철한 사람들. 바로 우한의 멋이다.



# 우한의 명소



●청천각(晴川閣) 명(明)대에 세워졌다. 창장을 사이에 두고 황학루와 마주서 있다. 최호의 시 황학루 한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동호(東湖) 항저우에 서호(西湖)가 있다면 우한에는 동호가 있다. 넓이는 서호의 6배다. 담수어 우창위(武昌魚)가 유명하다.



●구산(龜山) 고대 우(禹)임금이 창장의 치수를 이곳에서 했다. 우한 3진의 중심이다. 오른쪽으로 창장, 왼쪽으로 한수를 굽어본다. 전략가들에게 최고의 요충지였다.



●사산(蛇山) 삼국시대 손권이 하구성(夏口城)을 이곳에 지었다. 이후 수많은 절·탑·궁·전각이 세워졌다. 황학루가 위치한다.



●우한대학 뤄자산(珞伽山) 자락과 동호 변에 자리 잡았다. 산수가 조화를 이룬 곳에 중국 전통 정원의 풍모를 갖춰 중국 최고의 캠퍼스로 손꼽힌다.



●장한루(江漢路) 19세기 한커우의 서양 조계와 중국인 거주지의 구분선이었다. 당시 한커우의 부동산 재벌 유흠생(劉歆生)의 이름을 따 흠생로(歆生路)라 불렸다. 동양의 시카고로 불리던 당시의 풍광이 그대로 살아 있다. 우한의 명동이다.



●홍루(紅樓)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민국의 문’으로 불린다. 현재 신해혁명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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