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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나의 죽음, 당신의 죽음

중앙일보 2012.12.06 00:32 종합 32면 지면보기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50, 캔버스에 유채, 311.5×668㎝, 오르세 미술관 소장.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엔딩 노트’를 봤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막내딸이 쫓아다니며 찍고, 담담하게 해설한 일본 영화다. 평범한 회사원 출신 아버지는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대하듯 꼼꼼하게 본인의 죽음을 준비했다. 결혼식장 물색 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식장(장례식장)을 보러 갔고, 자신의 장례식 초청자 명단을 작성하고, 예금과 부동산, 신용카드와 통장에서 자동이체되는 것들을 정리했다. 가족, 특히 혼자 남게 될 아내를 배려한 엔딩 노트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가까운 이들과는 어떻게 이별해야 할까. 영화는 평소 잊고 살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서양 명화에서 죽음은 한참 동안 신만의 영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죽음이 아니라면 그림의 주제도 못 됐다. 그 죽음은 곧 부활이었다. 더러 왕이나 귀족들이 종교화의 장엄한 양식을 본뜬 그림의 주인공, 즉 망자로 등장하긴 했다. 천국의 약속마저 가진 자들의 것인 양 말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죽음을 다룬 ‘파격적’ 그림은 ‘오르낭의 매장’(1849~50). 그린 이는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던 사실주의자 귀스타브 쿠르베(1819~77)다. 오르낭은 스위스와 인접한 시골, 쿠르베는 이 고향 마을에서 열린 먼 친척의 장례식을 그렸다. 장례에 참석한 가족과 친지, 마을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림엔 우리가 알 만한 이도, 주인공도 없다. 관은 이미 뻥 뚫린 무덤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고, 가운데서 장례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일상적 업무일 뿐이라는 듯 심드렁하다. 붉은 옷을 갖춰 입은 장례 보조사들은 ‘언제 끝나나’ 하는 표정으로 사제의 입만 바라본다. 이전까지 죽음을 다룬 그림의 주인공이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사제의 장식품처럼 볼품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그림이며, 눈은 어디다 둬야 한단 말인가.



 프랑스 혁명 이후 구체제에 반기를 드는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것이 1848년 혁명이다. 단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소시민들이 강력한 정치의 주체로 나선 이듬해, 쿠르베는 신고전주의 역사화에나 쓰일 법한 초대형 캔버스에 시골 노인의 장례식을 그려 화단에 충격을 줬다. ‘파리의 낭만주의를 매장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또한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상의 일부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진리를 드러냈다. 평생 권력과 불화했던 쿠르베는 스위스로 망명해 사망했고, 사후 42년 뒤 오르낭으로 이장됐다. 저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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