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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묻을까요 심을까요

중앙일보 2012.12.06 00:31 종합 32면 지면보기
주철환
JTBC 대PD
한국어 배우는 외국인이 늘었다. 국어교사 출신 PD인 나에게도 기쁜 소식이다. 한국 노래를 합창하며 춤추는 모습이 흐뭇하다. 부산물로 가끔 기발한 표현도 접한다. “고양이 죽어서 땅에 심었어요.” 애교로 넘길 수 있지만 정답게 정답을 가르쳐준다. “심었어, 아니죠. 묻었어, 맞아요.” 이방인의 눈빛이 반짝인다. 보충교육이 필요한 순간이다. “심어요, 그러면 살아나요. 묻어요, 그러면 끝났어요.”



 어김없이 해는 저문다. ‘처음처럼’보다 ‘마지막처럼’이 어울리는 지점이다. 추수는 끝났지만 결산은 지금이 적기다. 올 한 해 뭘 묻고 뭘 심었나. 묻어도 되살아나는 게 있고 심어도 살아나지 못하는 게 있다. 욕심은 묻어도 되살아난다. 의심과 근심은 심어도 꽃으로 피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부르는 게 12월의 유행가다.



 망년회 대신 송년회란 말을 쓴 지는 꽤 됐다. 일본식이건 한국식이건 내 입장은 비교적 관대하다. 잊을 게 많으면 망년회를 열고 보낼 게 많으면 송년회로 이름 붙이면 된다. 어딜 가도 술이 있는 까닭은 잊고 보내는 데 그만한 약이 없어서일 게다. 약 좋다고 남용만 안 한다면 오죽 좋을까.



 ‘언어유희자’에게 망(忘)은 망(網, 望)이다. 분단의 철조망도 있지만 세계를 잇는 망(www)도 있다. 마음속에 어떤 망을 깔아야 행복할까. 밑줄부터 긋자면 행복의 동생 이름은 극복이지 보복이 아니다. 원망은 일생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원망을 품고 산다. 수리하거나 철거하지 않는다.



 유익하지 않은 망이 또 있다. 선망이다. 평생 부러워하다가 날 샌다. 그것도 모자라 대물림까지 한다. 엄친아, 엄친딸은 부자유친의 최대 걸림돌이다. 선망은 실망으로 필히 연장 운행한다. 종착역은 절망이다.



 선망과 색깔은 비슷하지만 열매가 다른 게 희망이다. 희망은 소망이 더 여문 상태다. 차이는 가능성의 유무. 소망은 ‘하고 싶다’지만 희망은 ‘할 수 있다’다. 소망이 애벌레라면 희망은 나비다. 선망은 적당할 때 희망으로 환승해야 한다.



 친구들 다수가 교단에 있는지라 모임의 주제도 그 언저리다. 교육에 대해 토론할 때 빠지지 않는 핵심어가 경쟁인데 앞서 말한 세 가지 망을 여기에 대입하면 원망은 경쟁자, 선망은 경쟁심, 희망은 경쟁력에 가깝다. 이 세 가지가 모여 있는 곳이 교실이다.



 교실의 프로듀서는 반장이 아니라 교사다. 모름지기 교사는 경쟁심이 아니라 경쟁력을 키우는 기획자여야 한다. 시청률, 아니 진학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입으로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왜일까. 말이 씨가 된다고 배워서다. 씨는 열매가 된다. 그러니 좋은 걸 심자. 심은 대로 거두리라. 이 말도 믿자. 그러나 내가 심었으니까 내가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자. 희망을 심는 자, 그걸로 훌륭하다.



 방송가의 송년회는 어떤가. 여기선 묻거나 심는 사람보다 뽑는 사람이 더 많았다. 몇 년째 ‘뽑기 열풍’이다. ‘슈스케’, ‘위대한 탄생’, ‘나가수’에서 ‘K팝스타’까지. ‘대학가요제’ 6년 연속 연출자인 나 역시 참 많이도 뽑아보았다. 그러나 아쉽다. 추억을 심었지만 열매는 희귀하다. 그러니 뽑힌다고 반색할 일도 못 된다. 뽑아 키우는 경우보다 뽑아 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김매기를 생각하면 쉽다. 농부가 뽑는 건 잡초이고 치과의사가 뽑는 건 충치다.



 표정이 어두운 젊은이에게 묻는다. “인상이 왜 그래?” “문제가 많아요.” 위안 삼아 건넨다.



 “문제가 많다니 문제집이로군. 네가 받은 시간의 선물이 바로 그 문제집 아닐까.” 말하고 보니 묘한 공통점이 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늘 하던 그 말. “여기서 풀어봐.” 문제를 푸는 건 결국 선물을 푸는 것이다.



 구겨진 인상은 구겨진 인생을 만든다. 원망이나 선망은 다리미가 아니다. 이기는 게 좋지만 비기는 게 낫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 다 아는 비밀이지만 이기려고만 하면 불행해진다. 올해의 명언은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 축하연설문 중에서 찾았다.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 내겐 이렇게 들린다. “부지런히 희망을 심어라.”



주철환 JTBC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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