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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박물관 하나 없는 ‘무역 8강’ 대한민국

중앙일보 2012.12.04 00:37 경제 7면 지면보기
독일 뮌헨에 건립된 ‘독일 박물관’에서 유물 복원을 전담하는 직원이 전시할 유물의 일부를 손질하고 있다. 109년 역사를 자랑하는 박물관에는 30여 개 분야 2만여 종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이를 보기 위해 매년 140만 명이 찾는다. [사진 산업기술진흥원]


현대자동차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李) 대리 노트’라는 게 있다. 주인공은 이충구(66) 전 현대차 사장. ‘기술 후진국’이던 1974년 무작정 이탈리아로 날아가 설계며 디자인을 꼼꼼히 기록한 3권의 노트다. 이를 뼈대로 최초의 국산 모델 ‘포니’가 탄생했다. 최근까지 서울대·국민대 등에서 강의도 많이 한 그는 “노트 얘기를 꺼낼 때면 젊은이들 눈이 반짝거렸다”며 “산업 발전을 위해 여러 사람이 기울였던 노력들을 더 많은 청년들과 공유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첫 민간 지프 ‘신진 지프’ 등
국내·세계 최초 개발한 유물
288개 중 45%는 사라져



 대한민국 무역액이 이달에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이 확실시된다. 11월까지 무역은 9795억 달러였다. 올해엔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무역 8강’에 진입할 것으로도 전망된다.



 한국의 산업은 1950년대 밀가루·설탕·면직물의 ‘3백(白) 산업’에서 출발했다. 내다 팔 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러나 ‘이 대리 노트’ 같은 땀방울이 모여 ‘가발→철강→자동차·스마트폰’으로 수출품이 진화했다. 무역 신화를 키우고, 이를 통해 전쟁 직후 53년 67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을 2만3000달러까지 끌어올린 건 ‘산업기술의 힘’이다. LG그룹을 창업한 고(故) 구인회 회장이 59년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을 내놨을 때도 그랬다. 한국이 삼성·LG 등을 통해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주름잡는 ‘전자 강국’으로 크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한국은 이렇게 산업부문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신과 성과를 대물림할 변변한 ‘산업박물관’ 하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일 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55~98년까지 국내 또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산업기술 유물’ 288개 중 45%가 유실되거나 존재 유무가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체신부가 개발한 자석식 전화기(61년), 첫 민간 지프인 ‘신진 지프’(69년), 롯데가 만든 세계 최초 컴포넌트 오디오(90년) 등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95%의 기업이 유물적 가치가 있는 제품을 창고에 처박아 둔 것으로 조사됐다.



  유럽이 산업혁명 초창기인 18세기부터 기술 유물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건립해 온 것과 대조적이다. 한상영 산업기술진흥원 기술문화팀장(박사)은 “산업기술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 아닌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다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국내의 경우 교통·과학 등 특정 산업에 국한된 일부 박물관과 기업홍보관이 존재하지만 운영이 취약하고,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 박물관은 없는 실정이다.



 신상철 경희대(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산업화 과정의 상징인 역사적 유물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며 “기술 인력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 산업기술 박물관 건립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일단 산업기술진흥원이 총대를 메고 유물 조사와 산업기술 역사(史) 정리 등 기초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갈 길이 멀다. 지식경제부는 산업기술 박물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건축비로 4500억원가량을 추산하는 등 밑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진척도가 더디다. 지경부 관계자는 “아직 예산 확보조차 안 돼 박물관 건립의 본격적 추진은 차기 정부나 돼야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기술 박물관의 기능은 정신적 유산에 머물지 않는다. 경제성도 크다. 관람객 방문과 행사 등으로 연간 11조원의 파급 효과가 생길 전망이다. 갈수록 기피하는 ‘이공계 인력’도 수천 명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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