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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IMF 15년, 초식시대의 한국 건축

중앙일보 2012.12.04 00:24 종합 36면 지면보기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
정확히 15년 전 어제 임창열 전 부총리는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앞에서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굴욕적인 ‘경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날이었다. 그로부터 ‘한국 경제는 IMF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혹독한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은행과 기업이 문을 닫고, 실직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위기 가운데 한국인의 저력도 보여주었다. 국민과 정부가 힘을 모아 구제금융에서 조기졸업을 한 것도 놀랍지만, 개도국 중 유일하게 인구 50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충족하는 2050클럽에 들어갔다. 나라의 곳간에는 외환이 쌓였고, 기업의 국제경쟁력은 한층 강해졌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양극화와 함께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삶은 팍팍해졌고, 사회로 나갈 젊은이들에게는 일자리가 없다.



 건축학자로서 신자유주의의 명암을 논할 역량은 없지만, 나는 한때 국가경제의 5분의 1을 차지했던 건설산업에 신자유주의가 드리운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0년대부터 한국 건축은 허물고 짓는 ‘개발의 역사’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건축의 질보다 양을 요구했다. 건축계가 우리 몸에 맞는 건축을 고민하고 실험하기도 전에 현실은 광포한 속도로 질주했다. 땅과 건물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금융자본이 건설산업에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건축주가 의뢰하고, 건축사가 설계하고, 건설사가 짓는 전통적인 구도였다.



 IMF사태 이후 이런 틀이 깨졌다. 구조조정을 거치며 강력해진 금융자본이 건설투자의 맛을 보고 직접 뛰어들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돈을 대고 판을 키웠다. 영화산업에 비유하면 이렇다. 건축사는 작가, 건설사는 감독, 은행은 투자자, 사용자는 관객이다. 이전에는 감독이 힘은 셌지만 대본을 맘대로 바꾸지는 못했다. 이제 흥행 대박을 노리는 투자자는 감독을 압박하고, 감독은 작가에게 대본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아예 감독이 대본을 맘대로 고치기도 한다. 관객의 선택권이 투자자의 손안에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금융자본이, 밑바닥에 건축이 자리하는 구도다. 이는 결코 창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건물을 양산하는 대형 조직과 작은 일감을 하나라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세한 개인으로 건축계를 양분했다.



 정부와 정치권도 가세했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각종 대형 국책사업을 벌였다. 중앙정부는 민간부문의 경기침체를 인위적으로 떠받드는 수단으로, 지방자치단체는 정치적 목적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대형 건축을 활용했다. 외환위기 이후 공공건축과 토목구조물의 허가 동향이 이를 증명한다. IMF사태 이후 15년 동안 차세대 젊은이들의 일할 몫까지 앞세대가 소진해 버렸다. 그리고 저성장, 저출산, 저에너지 시대를 맞았다.



 서울의 토탈 미술관에서는 한·일 양국의 젊은 건축가가 참여하는 ‘같은 집, 다른 집’이라는 색다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일본 건축가들의 작품에는 잃어버린 10년 이후의 사회상과 인간관계, 새로운 건축방식이 공통적으로 녹아있다. 그들은 성장이 멈춘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활 깊숙이 들어가 작은 건물로 치열하게 작업하는 초식 건축가들이다. 일본은 한때 거대하고 기념비적 건축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육식 건축시대가 있었다. ‘메타볼리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1세대 건축운동은 고도성장기와 운 좋게 맞물려 있었다. 현재 일본의 4세대 건축계는 소유에서 임대로, 공간의 점유에서 시간의 공유로 개념이 바뀐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런 모습이 한국의 미래에 그대로 적용될 것인가, 아니면 비켜갈 것인가?



 최근 해외 스타건축가들의 작품이 우리나라 이곳저곳에 세워지고 있다. 건축의 효용가치보다 상징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간파한 정치와 문화 권력의 영향이다. 대중매체도 건축가를 근사하게 조명하면서 건축계가 풍성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착시현상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미래 건축계의 허리가 될 젊은 건축가들은 육식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초식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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