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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미국 재정절벽 협상에 보이는 희망

중앙일보 2012.12.04 00:20 종합 38면 지면보기
정경민
뉴욕 특파원
“나와 아내 명의로 된 집이 몇 채냐고요? 글쎄요…. 보좌관 통해 알려 드리죠.” 2008년 8월 20일 존 매케인 공화당 대통령후보의 혀가 ‘실족(失足)’했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였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 캠프는 즉각 TV광고로 화답했다. ‘7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로 길거리에 나앉은 서민의 응어리진 가슴에 화끈하게 염장 질렀다.



 그해 11월 5일 오바마 캠프는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사상 최다 득표에 12년 만에 가장 큰 표차 승리. 들뜬 오바마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월가의 내로라하는 은행장들이 줄줄이 백악관으로 불려갔다. ‘살찐 고양이들’이란 면박을 당했다. ‘2%대 98%.’ 우리에겐 낯익은 ‘수사(修辭)’가 오바마 연설의 단골메뉴가 됐다. 교육·건강보험 개혁도 ‘쌍끌이’로 밀어붙였다. 뒷감당은 뒷전이었다.



 한데 이상했다. 부자 때리기에 환호할 줄 알았던 서민은 냉담했다. 오히려 ‘티 파티(Tea Party)’라는 골통보수 시민운동만 들불처럼 번졌다. 금융위기 핑계로 뒤룩뒤룩 찐 정부 뱃살부터 빼라는 구호에 중산층이 동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오바마는 88년 만에 최악의 패배를 맛봤다. 하원도 공화당에 헌납했다. 매사 공화당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식물 대통령’ 신세가 됐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던가. 이번엔 ‘벼락’ 권력에 도취된 티파티가 제 발등을 찍었다. 덮어놓고 정부 씀씀이부터 뭉텅 깎으라는 요구에 오바마가 버티자 자충수를 뒀다. 지난해 7월 정부 마이너스 통장인 국가부채한도가 차버리자 증액을 볼모로 도박을 벌였다. 미국은 요술 방망이를 가졌다. 언제든 방망이만 내려치면 달러가 쏟아진다. 달러 기근으로 미국이 부도 낸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티파티 몽니에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려버렸다. 사상 초유의 국가부도 위기에 ‘AAA’ 신용등급은 속절없이 깎였다. 미국인들 자존심에도 깊은 생채기가 생겼다. 지난달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 상처는 표로 분출했다. 티파티 후보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지난 4년 바둑판에서 오바마나 공화당이나 한 번씩은 다 죽었다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다시 ‘재정절벽(fiscal cliff)’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은 양 진영, 과거완 사뭇 달라 보인다. 오바마는 부자 증세를 공약으로 대선에서 이겼다. 성질 같아선 공화당을 묵사발 낼 법도 한데 꾹꾹 참는 기색 역력하다. 한껏 독이 올랐던 공화당 역시 발톱을 감추고 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타 깨춤을 췄다가 당한 아픔이 생생해서가 아닐까. 실패의 쓴맛에서 그나마 교훈을 얻은 거라면 재정절벽 협상의 앞날도 어둡지만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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