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맛깔스러운 우리식 한 상 차림

중앙선데이 2012.12.01 23:52 299호 22면 지면보기
1 비채나의 대표 메뉴인 ‘흑돼지 등갈비 구이’와 ‘능이버섯 갈비만두’에 ‘은대구 구이’가 함께했다.
소위 고급 한식당이라는 곳을 갈 때면 나는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 코스 요리 식으로 전채 요리, 주 요리, 디저트 순으로 음식이 나오곤 하는데 이런 ‘우아한’ 방식은 우리 한식에서는 전혀 익숙한 차림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격조있어야 했던 옛날 임금님들 수라상까지도 한 상 차림이었지 이런 형식이 아니었다. 한식을 고급화하는 과정에서 뭔가 품위있어 보이는 유럽식 식사 형태를 흉내내다 보니 이런 코스 방식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갓 쓰고 양복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7> 한식당 ‘비채나’

이런 식당들은 음식을 내어오는 데도 모양새를 지나치게 신경쓰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맛은 뒷전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 전통 음식이란 그저 맛깔스럽게, 정갈하게 차리면 그게 최고인데…. 이러한 불편한 느낌들 때문에 나에게 고급 한식집은 외국에서 손님이 왔을 때 한식도 나름 세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나 가는 곳이었지 편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곳은 아니었다.

2 한국적 전통미에 바탕을 두면서 세련된 국제적인 감각으로 구성된 비채나 내부 인테리어. 3 소모임을 할 수 있는 비채나의 내부 별실. 단아하고 우아한 공간이다.
그런데 최근 나에게 거부감을 주지도 않고 맛도 훌륭한 고급 한식당을 한 곳 알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이태원에 문을 연 ‘비채나’라는 곳이다.
‘비채나’는 새로 문을 연 곳이기는 하지만 그 뿌리는 오래됐다. 한식 세계화의 전도사로 유명한 조태권 회장의 광주요 그룹에서 2004년부터 6년 동안 운영했던 고급 한식당 ‘가온’이 그 출발점이다. 조 회장의 딸인 조희경(31) 대표가 ‘가온’을 통해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물려받아 새롭게 시작했다.

조 대표는 젊은 나이지만 16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미국·이탈리아에서 살아온 국제인이다. 미술과 패션을 공부했고 MBA도 받았는데 정작 그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음식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정식으로 요리를 공부한 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뉴욕의 페르세(Perse)에서 요리사 트레이닝을 받았다. 국제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본인이 그동안 공부해 온 패션·미술·음식 분야 등 다양한 지식에 광주요 그룹에서 쌓아온 노하우를 더해 자신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 바로 ‘비채나’다.

‘비채나’라는 이름도 조 대표 본인이 직접 지었다. 비우고 채우고 나눈다를 줄인 말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 고정관념들을 모두 비운 상태에서 처음부터 하나씩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채워 나가면서 그것을 음식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젊은 대표의 겸허한 마음 가짐이 이름 속에 담겨 있다.

두 달마다 바뀌는 다양한 단품 메뉴
기존의 고급 한식당들이 세트메뉴 위주인 것과 달리 이곳에는 단품 메뉴가 아주 다양하다. 상 차림도 코스 요리가 아니라 한 상 차림이다. 보여주는 것보다는 맛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곳이다. 두 달마다 메뉴를 바꿔 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몸 상태가 바뀌어 가면서 찾는 맛이 바뀌어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 조 대표의 설명이다. 메뉴를 그렇게 자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대단한 열정이다. 모든 메뉴는 조 대표가 ‘가온’ 때부터 일해 왔던 셰프와 함께 직접 개발해 나간다고 했다.

이곳에서 만드는 음식들은 모두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다양한 양념이나 젓갈, 육수 등을 이용해 맛을 낸다. ‘비채나’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흑돼지 등갈비 구이’는 새우젓 양념으로 재운 다음 굽는다. 원래 돼지고기와 찰떡궁합인 새우젓의 짭짤한 풍미가 등갈비 구이에 아주 구수한 맛을 선사해 줬다. 또 다른 대표 메뉴 중 하나는 계절마다 제철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내는 만두다. 이번 가을철에 준비한 만두 메뉴는 ‘능이버섯 갈비만두’였다. 만두를 한 입 베어물었더니 따뜻한 육수가 입안에 퍼지면서 능이버섯의 향이 가득 찼다. 조선간장에 재웠다는 소갈비살의 감칠맛과 아주 잘 어울리면서 깊은 맛이 인상적이었다.

‘비채나’는 고급 한식당이지만 우리와 다른 세계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형식보다는 맛으로, 친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술 한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식당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음식이면서도 막상 우리 한국 사람들과는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고급 한식의 답을 ‘비채나’가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화를 한다고 지나치게 ‘폼’에만 신경쓰지 말고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채나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67번지 2층 전화: 02-749-6795


음식, 사진, 여행을 진지하게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