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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감세 중단하고, 유럽은 조세피난처 손보고

중앙선데이 2012.12.01 23:25 299호 22면 지면보기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81년 7월 어느 날 대국민 긴급 연설을 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주제는 경제정책이었다. 그는 배우 출신답게 강약 완급을 조절하며 능란하게 연설을 풀어가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래퍼곡선(Laffer Curve)이었다. “세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투자를 비롯한 경제활동이 둔화해 결국 세수가 줄어든다. 세율을 높인다고 세금이 더 걷힌다는 보장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연설은 한 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30여 년 동안 ‘감세=경제 활성화’라는 공식이 경제학자뿐 아니라 정치인들의 상식을 지배하는 기본 패러다임이 됐다. 일세를 풍미한 이 시대정신이 요즘 공격받고 있다. 이 공식에 끈질기게 저항해 온 진보 이론가뿐만 아니라 보수 진영 정치인들까지 가세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듀, 감세 시대 . 지구촌 증세 도미노

영국 의회에선 지난달 셋째주 내내 청문회가 이어졌다. 행정부의 한 해 살림살이를 살펴보는 결산위원회(PAC)가 주최한 행사였다. 증언대에 세워진 인물은 바로 미국 굴지의 글로벌 기업인 구글·아마존·스타벅스의 영국법인 간부들이었다. 주제는 이들 기업의 ‘조세 윤리’였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여당인 보수당 소속 여성 의원 재키 프라이스가 직설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도대체 회계장부에 무슨 짓을 했기에 법인세를 내지 않는 거죠?” 구글 대표는 머뭇거리다 “우리는 부과받은 세금을 다 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노동당 소속인 결산위원장 마거릿 호지 의원이 끼어들었다. “우리는 증인들 회사가 법을 어겼다는 게 아니라 도의가 없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구글·아마존·애플의 불성실한 납세 질타
영국 정치인들이 여야 할 것 없이 왜 격분한 걸까.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 보도에 따르면 구글이 지난해 영국에서 거둔 매출은 40억 달러(약 4조3300억원)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 국세청 신고 매출은 6억2900만 달러로 실제 매출의 6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 결과 구글이 지난해 영국 정부에 낸 세금은 600만 파운드(약 104억원)에 불과했다. 구글이 부린 요술은 간단했다. 구글의 유럽 본사는 법인세율이 12.5%밖에 되지 않는 아일랜드에 있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5.25%의 절반 수준이다. 구글은 영국 법인 매출 가운데 상당 부분을 경영자문료 등의 명목으로 아일랜드 유럽 본사에 송금하도록 했다. 영국 법인은 이런 비용을 늘리는 방식으로 장부상 순이익 규모를 줄였다.

아마존도 프랑스에서 비슷한 수법을 구사했다. 이 회사는 유럽 본사를 조세피난처의 하나인 룩셈부르크에 뒀다. 영국이나 프랑스 고객이 아마존에서 책을 사면 매출과 순이익이 대부분 룩셈부르크에 있는 유럽법인의 회계장부에 잡힌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과 달랐다. 말로 닦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최근 아마존 프랑스 법인에 2억 유로(약 2810억원)짜리 법인세 고지서를 발부한 것이다. 아마존 유럽법인이 지난해 룩셈부르크 정부에 낸 법인세는 800만 유로였다. 25배에 달하는 세금 폭탄이 프랑스 아마존 법인에 떨어진 셈이다. 아마존 경영진은 극력 반발했다. 일단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기로 했다.

거대 글로벌 기업과 각국 과세 당국 간 세금 갈등은 유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주 정부는 최근 2950만 달러의 세금을 더 내라고 미국 애플에 요구했다. 애플이 호주에서 번 돈에 대한 세금을 조세피난처 등을 활용해 덜 냈다는 이유였다.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세금을 줄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다국적기업 간에 횡행하는 전형적 ‘세금 아비트러지(Tax Arbitrage)’다. 세율이 낮은 쪽의 매출과 순이익을 최대한 늘려 세율이 높은 나라의 세금 부담을 줄이는 절세 테크닉이다. 이는 최근까지 주요국 법인세율을 낮추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각국은 글로벌 기업을 조세피난처에 뺏기지 않기 위해 세율 낮추기 경쟁을 벌였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 아래 기업에 대한 웬만한 혜택이 허용됐다. 하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요국 정부들은 ‘조세 도의’를 내세우며 글로벌 기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애플 등 주로 미국 기반의 글로벌 기업들이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순이익의 원천이 미국에 있다. 실리콘밸리 등 미국 내에서 개발한 기술과 노하우를 이용해 돈을 벌었기 때문에 세금을 미국 정부에 내는 게 맞다”는 논리로 방어막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고향인 미국에서도 과도한 세테크(稅-Tech)에 대한 비판을 면치 못한다. 애플은 1000억 달러에 이르는 현금 자산 가운데 700억 달러 정도를 조세피난처인 버뮤다 등에 묻어 뒀다. 구글도 이런 방식으로 해외에서 248억 달러를 굴리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애플과 구글 등 글로벌 기업들이 해외에 은닉한 현금이 1조5000억 달러(약 1620조원)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캐나다나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규모와 맞먹는다.

어떻게 그토록 막대한 현금 자산이 미국 밖에 숨겨져 있을까. 글로벌 기업들은 해외 법인이 번 돈 중 일부만 미 본사에 송금한다. 핀란드 노키아, 일본 소니 등 다른 나라 글로벌 기업들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세테크를 애용한다. 미 정부는 2004년 기업이 해외에 파킹한 현금 자산을 미국 내로 들여오면 세금을 한시적으로 깎아줬다. 요즘 미 재계는 2004년과 같은 혜택을 달라며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적극 로비 중이다. 그러나 재계의 소망은 이뤄지기 힘들어 보인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도 재정위기를 앓고 있어서다. 오바마 행정부는 증세를 추진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올 연말 감세 혜택 중단과 재정긴축이 동시에 진행되는 ‘재정절벽(Fiscal Cliff)’을 피하려고 공화당 쪽과 협상하고 있다. 협상 결과에 따라 증세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증세 없이 재정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인들의 컨센서스가 된 듯하다.

미 글로벌기업들 해외 은닉자금 1620조원
미국의 세계 최대 보험회사 AIG의 로버트 벤모셰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재정 위기를 해결하려면 증세는 피할 수 없다. 미국 경영자들의 일반적인 중론”이라고 말했다. 이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미 재정 위기는 어김없이 증세로 이어졌다. 1861년 미 남북전쟁이 터지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개인과 법인 공통의 소득세를 처음으로 매겼다. 국세청(IRS)이 생긴 것도 이때다. 이 소득세법은 1872년 폐지됐다. 하지만 1910년대 초 미 정부 재정이 다시 불안해지고 대기업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자 소득세법이 부활됐다. 1912년 대선에서 이긴 우드로 윌슨은 취임 첫 해인 1913년에 소득세법을 제정했다. 초기에 소득세를 낸 사람은 전체 미국인(법인 포함)의 1%도 되지 않았다. 이후 미 정부는 윌슨의 소득세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더 거둬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을 넘겼다. 소득세 최고 세율은 한때 76%까지 치솟았다. 미 경제지 포브스는 경제·재정 위기와 전쟁의 귀결은 곧 증세라는 게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경영자들이 고려할 리스크(증세)가 하나 더 늘어날 듯하다고 일깨웠다. 실제로 “내년 기업 실적은 재정절벽 협상 결과에 달렸다”는 말이 뉴욕 월가에 나돈다. 세율이 결정돼야 순이익이 산출될 수 있어서다.

유럽은 세율 인상뿐 아니라 눈엣가시 같은 조세피난처를 없앨 요량이다. 유럽연합(EU) 정책 담당자들은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이 2009년 합의한 ‘조세피난처 제재’를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조세피난처 제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유럽은 ‘세금 정상회담(Tax Summit)’ 구상도 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EU 고위 인사들이 G20 정상회의에 버금가는 국제회의를 내년 중 열어 주요국들의 실질 세율을 동일하게 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최근 전했다. 실질 세율은 기업 등에 실제로 적용되는 세율이다. EU의 뜻대로 조세피난처 제재가 이뤄지고 세금 정상회담이 열려 실질 세율이 하나로 통일되면 세금 아비트러지가 사라질 수 있다. 이는 81년 7월 미 레이건 대통령 연설 이후 30여 년간 유지된 감세 트렌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주디스 프리먼(세법) 교수는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이나 미국 역사를 보면 증세와 감세 시대가 20~30년 주기로 반복된 경우가 많았다. 감세 시대가 30년 정도 지속됐으니 이제 막을 내릴 때도 됐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증세 시대는 향후 20년 이상 이어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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