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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1명이 상고심 한 해 3570건 처리, 설명도 없이 기각 77%

중앙일보 2018.06.27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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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받는 재판 <상> 
사법 정의 실현의 ‘최후 보루’로 불리는 대법원은 그동안 상고 사건을 기각할 때 이유만 2~3줄짜리를 붙인 판결문을 쏟아낸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매년 상고심 사건이 급증하면서 대법관 한 명이 처리해야 할 사건이 크게 늘어나는 악순환 때문이다.
 
상고심 사건은 2015년 4만1850건으로 처음 4만 건을 돌파했다. 지난해엔 4만6412건까지 늘었다. 대법관 한 명이 연간 3570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법원 사건의 심리, 재판 연구 업무를 담당하는 재판연구관 수는 2015년 108명에서 올해 99명으로 줄었다.

상고법원 추진하다 ‘재판거래’ 의혹
김명수는 작년 “상고허가제 이상적”
세 번 재판 받을 권리 침해할 우려

급증하는 대법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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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업무 과중이 ‘심리 부실화’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대법원은 민사 본안사건 1만3362건을 처리했다. 이 중 1만322건(77.2%)이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종결됐다. 심리불속행 기각이란 형사 사건을 제외한 상고사건에서 본안심리를 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것을 말한다. 기각 사유를 설명하지 않아 재판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높다. 이렇듯 부실한 심리에 최근 ‘재판 거래’ 의혹까지 더해지면서 사건 당사자들 사이에선 “대법원 재판도 신뢰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나온다.
 
상고심 문제의 해소 방안으로는 상고법원 도입, 상고허가제 부활, 대법관 증원 등 크게 세 가지가 거론돼 왔다. 이 중 상고법원 제도는 상고심 사건 중 일반적인 사건은 상고법원에서 처리하고, 판례 변경이 있거나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은 대법원에서 처리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은 재판거래 의혹과 맞물리면서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특히 상고법원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청와대 로비와 판사 뒷조사 등 사법행정권을 부적절하게 행사한 정황도 드러났다. 서울변호사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는 “상고법원은 상고심 문제 해결의 차선책이 될 수 있었지만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도입을 밀어붙이다가 치르는 대가가 너무나 참혹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이 상고심 사건을 선별해 심리하는 상고허가제는 1981년 3월 도입됐다가 90년 9월 폐지됐다. 국민의 ‘세 번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법관 증원은 가장 손쉬운 방안이다. 그러나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최고법원으로서의 존재감이 낮아진다며 대법원 측이 반대한다. 양승태 행정처는 “민변 등 진보적 인사들이 대법관에 진출할 수 있다”며 부정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실효성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현재 13명인 대법관을 20명 수준으로 늘린다 해도 대법관 1인당 연간 처리 사건은 2320건에 달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난해 인사청문회에서 “상고허가제가 이상적이고 대법관 증원과 상고법원 도입도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원 내에서도 “대법관들이 밀려드는 사건에 치여 철저한 심리와 법리 분석을 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 김 대법원장이 어느 방안이든 상고심 제도 개선에 나서지 않으면 재판 불신을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손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