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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풍운아 료마 묘역 ‘교토의 야스쿠니’로 변해
채인택 기자 사진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풍운아 료마 묘역 ‘교토의 야스쿠니’로 변해

중앙일보 2018.07.04 00:33 종합 20면 지면보기
메이지 유신 150주년 현장을 가다
‘지방 야스쿠니’의 하나인 교토 료젠 호국신사의 입구. ‘메이지 유신 풍운아’인 료마의 묘지와 태평양전쟁 전범의 무죄를 주장한 인도인 팔 판사를 기리는 비석이 함께 있다.

‘지방 야스쿠니’의 하나인 교토 료젠 호국신사의 입구. ‘메이지 유신 풍운아’인 료마의 묘지와 태평양전쟁 전범의 무죄를 주장한 인도인 팔 판사를 기리는 비석이 함께 있다.

최근 찾았던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엔 150년 전 메이지 유신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현대사와 부국강병의 시작이다. 1603~1867년 264년간 일본을 지배했던 도쿠가와(德川, 또는 에도(江戶)) 막부가 무너지고 폭넓은 개혁을 통해 일왕 중심의 중앙 통일권력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에도 막부는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지방을 여러 한(번:藩)으로 눠서 다스리는 봉건제, 사농공상(士農工商, 여기서 사는 선비가 아니라 무사)의 신분제, 네덜란드와의 제한적 교역을 제외한 쇄국이 특징이었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에도만에 진입한 뒤 막부가 무기력하게 불평등조약을 맺고 개항하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진 것이 계기다. 다양한 논란과 갈등을 거친 끝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웅번(雄藩·유력 한)인 사쓰마(薩摩·현 가고시마현)와 조슈(長州·현 야마구치현)가 1866년 연합하면서 막부에 결정타를 날렸다.
 
삿초동맹(薩長同盟)으로 불리는 이 연합을 주선한 인물이 ‘유신 풍운아’로 불리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다. 그는 같은 도사(土佐)한 출신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1838~1867)와 함께 이를 성사시켰으나 이듬해 둘 다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 이 두 사람의 묘지는 고향이 아니라 의외로 교토에 있었다. 교토 동부 료젠(霊山) 호국신사에서 그들의 묘지를 찾았다. 둘이 나란히 묻힌 묘지는 소박했으며 묘비는 세월에 빛이 바랬다. 묘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중생 셋이 와서 참배했다. 시바 료타로의 인기소설 『료마가 간다』와 2010년 NHK 대하드라마 ‘료마’ 등 숱한 방송극 등에서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꾼 청년으로 묘사했던 료마의 묘지이니 그럴 만도 하다.  
 
문제는 장소였다. 안내서적에 따르면 이곳은 ‘지방 야스쿠니’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 52개나 있는 호국신사의 하나였다. 료젠 호국신사는 전몰자 유해나 영령을 안치하고 추모하는 시설에 그치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이 인도인 법률가 라다비노드 팔(1886~1967)을 기리는 대형 비석이었다. 태평양전쟁 종전 뒤 46~48년 도쿄에서 열렸던 극동군사재판에 참가했던 11개국 12명의 재판관 중 유일하게 일본인 전범 전원의 무죄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태평양전쟁 1급 전범들을 합사한 도쿄 야스쿠니(靖国)신사와 더불어 일본에 두 군데 있다는 팔 박사 현창비다. 근처에는 대동아전쟁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만든 료마의 묘지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일본 근·현대 침략의 과거사를 부정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물 타기를 시도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적막한 료마의 묘지.

적막한 료마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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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은 애초 막부 말기와 유신 과정에서 숨진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1868년 5월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관제 시설이다. 지금은 300여 명의 메이지 유신 관련 인물의 묘지와 함께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도쿄부 출신자 7만3011명의 영령을 봉안한다. 유신 추모 시설에 침략전쟁 희생자를 함께 봉안한 것을 보니 ‘역사 성찰’이나 반성은커녕 침략 미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자발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걸은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맞아 반성이나 반복 방지 노력, 그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커녕 침략행위에 대한 무죄만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니 보는 이들이 거북해할 수밖에 없다.
 
정부 문서를 보관하는 도쿄 국립공문서관에선 ‘에도 막부, 마지막의 싸움’이라는 전시회가 열고 있었다. 에도 막부도 말기엔 개혁에 나서 행정 제도와 군대 혁신을 위해 노력했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19세기 중국 아편전쟁은 물론 멀리 유럽 프랑스의 대혁명, 나폴레옹 군대에 대한 정보까지 수집한 내용이 돋보였다. 메이지 유신 과정과 관련한 생생한 사료도 살펴볼 수 있었다. 264년간 일본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가 통치권을 반환한 1867년의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를 폐지하고 일왕 중심의 정부를 세운 1868년의 왕정복고(王政復古) 등 역사와 관련한 사료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군함을 건설해 해군력을 증강한 과정도 자세하게 다뤘다. 메이지의 무츠히토(睦仁)라는 서명이 선명한 1889년 일본제국헌법 조서와 쇼와(昭和)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47년 반포한 일본국헌법(평화헌법) 조서도 전시됐다. 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항복할 때 발표했던 ‘종전의 조서’도 보였다. 두 헌법과 항복 조서는 작은 사본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문제는 150년이 넘는 긴 시기의 사료를 생생하게 전시하면서도 침략의 역사는 외면했다는 점이다. 일본 근현대사에서 주변국을 괴롭힌 사실은 망각의 대상일 뿐 반면교사의 대상도 아닌가. 
 
메이지 유신 과정
1853년 흑선내항(黒船来航) 미국 페리함대, 에도만(도쿄만) 진입해 통상 요구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에도(江戶) 막부, 200년 쇄국 끝내고 미국에 개항
 
1857년 정한론(征韓論·조선침략) 등 극우사상 창시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년), 조슈(長州, 야마구치현)에서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숙장 취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키움
 
1866년 삿초 동맹(薩長同盟): 사쓰마(가고시마현)와 조슈가 연합해 막부에 도전. 도사(土佐)번 출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慎太郎)가 주선
 
1867년 1월 무츠히토(睦仁) 일왕 14세로 즉위. 대정봉환(大政奉還): 264년간 일본 지배한 도쿠가와 막부, 통치권 반납
 
1868년 1월 왕정복고(王政復古) 막부 폐지, 일왕 정부 수립 
3월 에도개성(江戶開城): 신정부, 옛 막부의 수도인 에도(도쿄)에 무혈 입성
10월 메이지 정부 수립: 무츠히토 즉위, 연호를 게이오(慶応)에서 메이지(明治)로
 
1868~1869년 막부파와 반막부파 사이에 보신(戊辰)전쟁/반막부파 승리
 
1869년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김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 다이묘(大名·영주)들, 일왕에게 영지·백성 반환
 
1871년 폐번치현(廃藩置県): 봉건제 지방통치기구 한번·(藩) 폐지, 중앙 직할 후(부·府)·켄(현·県) 설치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 다카모리, 정한론 반대에 반란 일으켰다 진압되자 할복
 
1885년 일본 내각 수립, 초대 총리로 조슈 출신 이토 히로부미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발표
 
1880년 제국의회 개원
 
글·사진 도쿄·교토=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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