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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김정은의 기묘한 서사적 언어

중앙일보 2018.06.14 02:22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북한의 신화는 계속된다. 그것은 불패(不敗)의 협상력이다. 신화의 극적 요소는 강화됐다.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다. 주역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미국의 협상 목표는 엄격했다. 북한 핵무기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로 비쳐졌다. 뚜껑이 열렸다. 기대와 예측들이 깨졌다. 김정은-트럼프의 4개 항 공동 성명에 CVID는 빠졌다. 그것은 기습적인 반전이다. 김정은의 막판 역전승이다.
 
젊은 영도자는 근사했다. 그의 언어는 서사적으로 짜여졌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평화의 전주곡…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 역사에는 거대한 전환점이 있다. 그런 어휘는 그 순간을 장엄하면서 교묘하게 만든다. 속임수와 기만술도 덮어준다.
 
트럼프의 언어 방식은 비즈니스적이다. 최상급 격찬이 쏟아졌다. "만나서 무한한 영광… 굉장히 성공할 것… (김 위원장은) 매우 훌륭하고(worthy), 똑똑한(smart) 협상가.” 72세 트럼프의 인상은 노련했다. 그는 34세 은둔의 독재자를 세상 밖으로 이끄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어휘는 상투적이다. 그 폭은 좁다.
 
회담의 출발은 시각적 충격 효과다. 카펠라 호텔 회담장 입구에 성조기와 인공기가 놓였다. 6개씩 겹쳐져 색감은 대담해졌다. 그 상징성은 격렬하다. 양국은 70년 적대관계다. 북한에 미국은 ‘철천지 원쑤’다. 그것은 반목을 푸는 장치다. 김정은-트럼프의 첫 악수 배경이다. 김정은 언어의 힘은 기묘해진다. 그것으로 기괴한 신정국가의 지도자는 변신한다. 트럼프는 언어전쟁에서 밀렸다.
 
박보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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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 결과는 심하게 기울었다. 핵무장 해제의 시간표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한다”로 돼 있다. ‘노력’은 통제하기 힘들다. 합의문은 과거 9·19 공동 선언문(2005년)의 수준보다 떨어진다. 북한을 위한 체제 보장은 뚜렷해졌다. 그것은 3대 세습 통치자의 결정적인 성취다.
 
회담 뒤 트럼프의 기자회견 발언은 혼란스럽다. "시간이 없어서 (CVID)는 다 담을 수 없었다. …완전한 비핵화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CVID는 장밋빛 환상인가. 북핵 전문가 갈루치는 이미 그런 진단을 내렸다. "CVID는 정치적 허튼소리(crap) 더미다.”(5월 14일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원 토론회) 그는 1994년 제네바합의 때 미국 수석대표다. 북한의 구도는 핵 있는 평화다. 순차적 폐기와 장기간 보상받기다. 트럼프는 협상 전에 "이번이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기회’를 자른다. 그것이 협상술의 진수다. 트럼프는 거래의 달인이다. 그 화려한 평판이 이번에 망가졌다.
 
트럼프는 지난해 10월 "북한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합의를 위반했고 미국 협상가들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했다. ‘바보 짓’은 과거 정권의 갈루치와 크리스토퍼 힐(전 국무부 차관보)이다.  
 
이번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바보들 대열에 진입 중이다. 그는 협상 전날에도 장담했다. "CVID만이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과거 트럼프의 폼페이오 칭찬은 인상적이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육사) 수석에 하버드대(로스쿨) 수석 졸업이다.” 하지만 국제정치 기술은 경험의 축적, 집중력이다. 상대방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경력은 산전수전이다.
 
트럼프의 한·미 연합훈련 시각은 자극적이다. "워 게임(war games)은 도발적(provocative)… 엄청나게 비싼 훈련, 중단하겠다…” 그 말들은 고정 관념을 해체한다. 연합훈련은 한·미 동맹의 기둥이다. 그 이미지는 냉전의 자유 투사다. 트럼프는 세상을 돈으로 접근한다. 그의 아메리카 퍼스트의 냉정한 면모다.  
 
주한미군의 장래도 미묘해졌다. 트럼프의 직설은 이어진다. "지금은 감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주한미군)을 돌아오게 하고 싶다.” 그 발언은 불길하다. 6·25전쟁의 종전선언도 예고됐다. 주한미군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한반도 질서는 소용돌이 속에 들어갔다. 낯선 세상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 방법은 주인의식의 단련이다. 시작은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핵심은 주한미군에 의존하지 않는 자세다. 국민 전체가 국가 안보의 연출·주연이 되는 것이다. 보수진영은 6·13 지방선거에서 몰락했다. 그 진영의 재기는 기약 없다. 그럴수록 주인의식을 갖춰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선명하다. "한반도 문제만큼은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자세와 의지를 잃지 않도록….” 그런 마음가짐은 모든 국민에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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