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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북한판 신 마셜 플랜의 조건 싱가포르서 찾을까

중앙일보 2018.05.18 01:22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1960년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주민들을 달래려 던진 구호가 56년 만에 ‘철천지원수’ 미 고위 인사의 입에서 나왔다. 평양을 방문하고 온 폼페이오 국무장관 얘기다. 그는 북한의 과감한 비핵화를 조건으로, “(미국의 농업과 기술 지원으로) 북한 주민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62년 김일성 주석이 천리마운동 독려차 했다는 “인민들이 이밥(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살게 하겠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폼페이오의 ‘말씀 자료’ 담당자가 북한의 귀에 쏙 박힐 ‘고기’란 단어를 일부러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평양서 만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할아버지의 천리마를 업버전한 만리마로 주민들을 속도전으로 몰고 있고, 예나 지금이나 북한의 ‘꿈’이 밥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트럼프 대통령은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성한 북한에 대해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 정책을 구사했다.  중국까지도 역대 최대치의 경제 제재에 동참시키며 지난 1년 간단없이 압박했다. 그가 김정은과 마주 앉겠다고 한 이후 ‘최대한의 관여’가 주목받고 있다. 비핵화한 북한의 경제부흥, 이른바 북한판 ‘신 마셜 정책(Marshall Plan)’이란 용어가 언론·학계에서 나오더니 “북한을 한국처럼 번영하도록 돕겠다”는 폼페이오의 언급 이후엔 화두가 됐다.
 
공교롭게도 폼페이오 장관 취임 즈음인 지난 4월 14일은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이 실행에 들어간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서유럽으로 가는 식량선 6척 중 첫 배인 ‘존 H 퀵’함이 밀을 가득 싣고 텍사스 갤버스턴 항구를 떠났다. 48~52년 130억 달러(현재 가치로 5800억 달러)가 투입돼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을 부활시켰다. 오늘날 서유럽통합의 기초가 여기서 다져졌고, 전후 힘의 공백 상태가 된 유럽에 미국 중심의 안보체제가 구축됐다. 미국 외교사에서 첫손 꼽히는 성공 사례다.
 
다음 달 12일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완전한 비핵화를 하라, 그러면 찬란한 미래가 온다.” 마크 내퍼 주한 대사 대리는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 방한 시 ‘김정은이 옳은 선택을 하면 북한과 주민에게 밝은 미래가 열린다’고 한 연설이 현재 미국이 북한에 제시하는 비전의 바탕”이라고 했다. 중국과도 비핵화한 북한을 국제경제망에 편입시킨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고, 이를 통해 동북아의 평화·안정을 도모하려 한다고 했다. 전략적 이해가 맞서는 중국과의 복잡성이 있지만, 북한판 마셜 플랜의 얼개가 읽히는 대목이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와 국제화를 통한 번영’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하느냐가 관건인데, 망명한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는 북한의 단계적·동시적 핵 해법은 "김정은체제 권력구조의 보강 과정으로, 결국엔 비핵화 종이로 포장된 핵보유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완전한 비핵화의 필수 과정인 전면적 핵사찰은 북한의 수령 권력 구조를 허물게 돼 김정은이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지난 25년간 보여준 기만사도 비관적 전망의 배경이다.
 
2년 후 트럼프는 재선의 갈림길에, 경제 총력 노선으로 방향을 튼 김정은은 국가경제발전5개년전략의 성패 심판대에 선다. 회담이 무산되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2020년을 함께 보며 싱가포르에서 대좌한다. 북한판 마셜 플랜의 길이 열리느냐도 드러날 거다. 관료라기보다는 외교전사란 말이 더 어울리는 존 볼턴 안보보좌관과 폼페이오를 좌우에 포진한 거래의 달인 트럼프에게 ‘가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북한의 도발 ‘과거사’와 인권 문제를 덮을 수도 있다. 김정은에겐 기회다. 그가 걱정하는 체제 안정은 내부의 문제다. 억압적 폐쇄 체제는 언젠가는 무너진다. 그러나 인민들에게 ‘고기’를 먹이고 점진적이나마 억압체제를 개선해 나가면 저항 지수도 낮아진다. 마셜 플랜의 주창자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유럽을 부흥시킨 공로로 195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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